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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그 Sep 08. 2023

경찰서에 전화한 날

여덟번째 편지, 도움 받는 기분

안녕 결, 민경이야. 


껍질이 얇고, 향긋한 귤을 먹으며(사실 방금 다 먹었어)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이 귤은 오후에 들린 서점에서 시집을 사며 받은 것인데, '귤이 달아요'라는 말과 함께 귤을 건네던 주인장님의 말이 귤을 먹는 내내 귓가에 들리는 듯했어. 기대를 하면 높은 기준을 세우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귤은 다디달았거든. 어딘가 잘못될 것 같은 극악무도한 단맛이 아니라, 첫입부터 삼키고 난 직후까지 부담 없는, 은은하고 고르게 퍼지는 순한 단맛이었어. 앞서 밝혔듯 귤은 이미 내 손과 혀와 목구멍을 떠났지만, 책상에는 귤껍질과 귤향이, 입 안에는 귤맛이 아직 남아 있어. 


*


결, 너는 혹시 112에 전화해본 적 있니? 나는 옛날에 살던 집 현관문에서 먼 곳의 산이 훤히 보였는데, 그곳에서 반짝거리는 불규칙한 불빛이 꼭 구조신호 같아서 112 버튼을 눌렀던 적이 있어. 확인 결과 다행히 구조 신호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수년이 지나 이번 주, 다시 그 번호를 누를 일이 있었어. 


격리가 끝나고 첫 출근을 했던 날이었어. 간헐적으로 막히는 목구멍이 신경 쓰였지만, 오랜만에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펄펄 끓는 닭요리를 나누어 먹고, 업무를 정리하는 시간들이 반가웠어. 그렇게 회사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가뿐해진 마음을 안고 집에 도착했어. 손을 씻으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내가 아침에 나설 때와 다른 점이 보였어.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명백히 다른 점이. 


화장실에서 나와 방을 서성이며, 내가 무언갈 놓쳤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어. 결론이 나지 않아서, 누군가 방에 들어왔던 것은 아닌지 복도 cctv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관리인에게 전화하니 경찰에게 연락하는 게 제일 빠를 거라 이야기했어. 경찰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일이 커지는 것 같아 두려웠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이 방에서 잠드는 것이 더 무서워 112를 눌렀어. 제가 혼자 사는데... 집에 돌아오니 좀 다른 점이 있고... cctv를 확인하려는데... 침착하려 했지만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전달했고, 가만히 듣던 저편에서 출동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건네져 왔어. 


3분이 조금 지났을까,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경찰관 한 분과 중년 남자 경찰 한 분이 오셨어. 내 방을 잠시 확인하고, 같이 cctv가 있는 곳으로 가서 내가 없던 시간의 복도 영상을 확인했어. 빠르게 흐르는 화면을 보며 누군가 나오면 최악인데, 안 나오면 또 어쩌지? 라고 생각했어. 확인 결과 내가 방을 비운 사이 내 방으로 들어간 사람은 없었어. 화면을 두 번 더 돌려본 후 cctv 기계를 정리하시는 경찰관 분들의 분주한 뒷모습을 보면서, 그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아서 죄송하다는 말이 개미 같은 목소리로 튀어나왔어. 경찰 분들은 그 말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며 즉각 아니라고, 또 무슨 일 있으면 꼭 112로 신고 달라고 이야기해주셨지. 그리고 아무 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나를 위로하고 안심시켜주셨어. 방으로 돌아와서는 관리인 분께 전화했어. 소란을 피운 것 같아서 멋쩍게, 제가 착각했나 봐요...라고 말했는데 관리인 분이 잘한 거라고, 안전이 우선이라고, 혹시 모르니 비밀번호 바꿔두라고 말해주셨어. 


전화를 끊고는 한참 동안 어떤 기분에 빠져 있었어. 낯선 이들에게 도움받는 기분에. 불안한 이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고, 다독이는 마음들에 대해 생각했어. 그렇게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후에는 그 마음들을 메모장에 적어두고, 끝에 한 줄을 붙였어.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


결, 그래서 오늘은 네게 어떤 마음에 대해 묻고 싶어.

네가 받았던 마음 중, 다른 이에게 똑같이 건네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는지 궁금해.  


*


격리가 끝나고 일주일을, 살금살금 언 연못을 건너듯 보냈어. 일상이 불편할 정도의 후유증은 없었지만, 다시 아프고 싶지 않아 컨디션 회복에 심혈을 기울였지. 심혈을 기울였다 표현했지만, 사실 외출 일정을 줄이는 것이 내가 한 모든 것이었어. 그래도 이번 주말에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독서모임에 나가고, 번화가를 조금 걷기도 했어. 


연말이 얼마 남지 않아 약속을 조금씩 잡고 있어.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생각에 벌써 기분이 좋아. 나란히 둘러앉아 맛있는 걸 나누어 먹으며, 올해 우리가 어떤 감정들과 시간들을 함께 지나왔는지 돌아보고 싶어.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데, 어쩐지 그런 말은 조금 부끄러워서 가능할지 모르겠네.(웃음)


날씨가 충분히 추워지지 않아서, 오히려 따듯해져서 개나리와 진달래가 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조마조마했었어. 그런데 다행히 다음 주부터는 영하의 날씨가 시작된다고 해. 겨울다운 겨울이 시작되길 바라고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따듯한 계절에 대해 물었을 때, 의외로 겨울이라 답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따듯한 곳을 찾고,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계절. 붕어빵, 고구마, 전골같이 따듯한 음식을 속으로 밀어 넣는 계절. 붙어 걷게 되는 계절. 가장 춥지만 그렇기에 따듯함이 가장 가깝게 다가오는 계절. 그 계절의 초입에서, 네가 그 계절을 평안히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 


그럼 결, 감기 조심하고.

우리는 다음 주에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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