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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그 Sep 08. 2023

사람을 '소유'한다는 말

여섯번째 편지, 소유에 대하여

결에게,   


안녕 결아, 민경이야.

오늘 이곳의 날씨는 하루 종일 덥고 습했어.

바깥에 있다가 에어컨이 있는 실내로 들어오는 사람들 입에서 ‘살 것 같다’ 또는 ‘진짜 덥지 않냐?’ 같은 말들이 생각할 새도 없이 터져 나오는, 그런 날이었어.


아침부터의 긴 외출을 마치고, 오후 6시를 넘겨 집으로 돌아와서 난장판이 된 방을 정리했어. 하나씩 물건들이 자리를 찾을 때마다 마음도 그렇게 정돈되는 것 같더라.


그리곤 평소보다 물 온도를 차게 해서 샤워를 하고, 둥근 얼음 두 개를 꺼내 얼음물을 만들어 책상 앞에 앉았어. 조금은 가볍고 시원해진 몸과 마음으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어.


오늘, 바람이 힘껏 불어주는데도 땀이 그칠 줄을 모르는 이마와 등허리를 달래며 낯선 교정을 오래 걸었어. 그곳이 아주 익숙한 사람의 발자국 옆에 함께 자국을 내면서.


한참을 그렇게 걸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 안에도 그 장소들의 과거가 자리 잡더라고. 그러니까 아무 기억도 없는데 그리움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 그게 재밌었어. <어금니 깨물기>라는 산문집에서 김소연 시인님은 이렇게 말해.


“장소라는 말과 공간이라는 말은 엄연히 구별된다. 장소는 시간이 부여해준 가치와 역사가 부여해준 이야기를 함께 담은, 고유한 이름이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영위하는 한 개인의 양태들이 냄새처럼 고스란히 밴 곳이기도 하다. 장소는 유일하고 공간은 보편이다. 장소는 변화를 겪고 공간은 그대로다. 장소는 파괴되지 않지만 공간은 파괴될 수 있다.”


시인님의 정의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오늘 나의 그 산책은 공간을 장소로 바꾸는 산책이었던 거지. 기억들은 모두 빌려온 것이지만.


*


어제는 샤워를 하다가 ‘소유’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물건을 소유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지만 기억을 가지는 것에는 욕심이 많아. 그리고 네가 혹시 오해할까 봐 조심스럽긴 하지만, 사람을, 관계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 누군가는 ‘사람’이라는 단어와 ‘소유’라는 단어를 나란히 두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를 내겠지만 나는 그 두 단어를 떼어내지 못하는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기로 했어. 


예전에 그 마음은 너무 위험했어, 폭력으로 흐르기 쉬운 마음이었지. 누군가 내 욕망을 욕망해주길 바라는 마음, 그렇지 않으면 화가 나는 마음, 필요할 때 항상 곁에 있어야 한다는 마음, 적절한 말들을 건네주었으면 하는 마음, 떠나면 안 된다는 마음.


그 마음은 불가능함은 물론 도덕적이지 않아서, 그 마음을 가진 나를 숨 쉬듯 비난하고 또 교정하려 했어. 하지만 마음은 그런 식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지. 시간이 필요했어.


나는 여전히 ‘사람’과 ‘소유’를 나란히 두곤 하는 사람이지만, 예전만큼 그 마음에 부적절함을 느끼지는 않아. 위에서 이야기한 위협적인 마음들이 이제는 옅어지고 한 가지 마음만 조금 어투를 바꿔 선명히 남았거든.


‘떠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


저 사람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는 마음이 들 때 나는 그 사람을 소유했다고 여기게 되었어. 더 들여다보고, 두텁고 선명하게 만들고 싶어서 이 마음에 대한 긴 시를 적어볼까 해. 어제는 두 문장을 적어두었어.


떠나지 않겠다,

생각이 들면 가진 것 같았다


*


어릴 때 ‘-같다’는 표현은 자신감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며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어. 하지만 ‘-같다’라는 말을 ‘-다’로 바꿔쓸 때마다 어색했지. 지금은 ‘-같다’는 말을 그냥 자주 쓰고 있어. 그리고 그 말을 쓰는 사람을 더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요즘은 특히 더 그 말을 자주 써.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거든.


낯선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얼른 단정 짓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기도 해. 편견에 기대고 싶기도 하고.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사람 사이 발생하는 불가피하거나 그렇지 않은 상처들이 너무 무섭거든. 그래서 빨리 이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파악해서 내게 줄 수 있는 상처를 예방하고 싶은 거지. 생존 욕구에 가까운 마음인 것 같기도 해. 그러나 그게 최선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그 충동을 억누르지.


코로나19가 심할 때는(물론 지금도 조심해야겠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어. 원래 알던 사람들도 만나기 어려웠으니까. 그러다 보니 관계에서 오는 자극점이 줄어 그게 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억눌리기도 했던 것 같아. 그런 시간들이 어떤 에너지가 되어서, 요즘 나는 여러 사람들과 다양하게 어울리며 지내고 있어. 기쁜 일이지만, 앞서 말했듯 관계에 대해 불안이 커서 고민도 많아지고 있어.


특히 이번 주에는 사람 간의 거리감에 대해 생각했어. 이 분야에서는 아무래도 난로 비유가 유명하지? ‘인간관계는 난로와 같다, 너무 멀면 춥고 가까우면 뜨겁다.’ 식의 말들 말이야. 나는 이 비유를 정말 싫어했어. 나는 다른 사람과 한없이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었거든. 내핵까지 가야 겨우 만족을 하는. 예상 가능하듯, 많은 부작용이 있었어. 그중 몇 가지는 내게 영구적인 흔적을 남기기도 했지. 그럼에도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던 때 만난 문장이 있어.


"거리가 없다는 것은 가까움을 뜻하지 않는다. 거리의 소멸은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은 풍부한 공간을 바탕으로 하는데, 거리의 소멸은 공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한병철, 투명사회)


어쩌면 난로 비유와 비슷한 결을 가진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말에 단번에 설득되었어. 나를 괴롭게 했던 관계들의 거리는 너무 멀거나 가까웠던 게 문제가 아니라 거리가 소멸되었기 때문이구나 싶었지. 하지만 이걸 깨달았다고 사람 사이의 거리를 잘 조절하게 되었다는 건 아니야.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아주 풍부한 공간이 있으니까 말이야.


요즘은 이 말을 떠올리며 훌쩍 가까워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어렵지만,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앉아 평안한 쪽보다는 강처럼 굽이치는 관계들 사이를 유영하는(허우적거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편이 내게는 더 행복한 것 같아.


관계에서의 거리를 생각하는 내가 누군가에게는 계산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사랑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거든. 그래서 그런 말로 나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해.


결아, 너는 어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네가 섬세하게 생각하려고 하는 부분이나 오랫동안 간직해온 고민이 궁금해.


내가 답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 묵은 고민들을 말하는 과정에서 네가 무언가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내가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게 있듯이 말이야.


*



결아, 비가 조금 시원하게 내려주면 좋겠는데

빗소리 한 줄 없이 물속에 있는 기분만 가득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어.

마른 장마는 별로인데 말이지.


그럼에도 씩씩하게 지내고 싶은 요즘이야.

냉방병 조심하고, 더위도 조심하고


건강하게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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