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그 Sep 08. 2023

무언가 잃었을 때의 네가 궁금해

첫번째 편지, 상실에 대해서

결에게,


안녕 결아, 민경이야.

기차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새소년의 난춘을 들으면서.

고향에 다녀오는 길이야, 할머니의 첫 기일을 챙기려고.


전을 부치고, 나물을 산더미같이 삶는 그런 제사는 이제 않기로 해서,

이른 아침 아빠랑 시장에 가서 미니족발, 전복, 떡, 과일들을 사 왔어.

저녁에는 피자와 치킨을 포장해와서 상차림을 마무리했지.


피자를 든 아빠가 방에 들어오더니, 피자집 사장님이 정말 친절하시다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며 감탄하셨어. 그리고 한 번, 또 한 번 더 그 이야기를 하셨지. 나는 얼굴도 모르는 피자집 사장님에게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했어. 그날 가장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아빠였으니까.


사실 제사라면 거부감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야.

가부장제 속에서 이미 본질을 잃은지 오래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억압의 수단이 되고 있으니까. 그리고 형식이나 절차보다는 고인에 대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가끔 그 틀 때문에 마음이 도망가 버릴 때가 있어서.


그럼에도 아빠에게는 향을 피우고, 할머니 사진을 상에 올리고, 음식을 차리고, 법주를 부었다 버리는 그 의식이 필요함을 이해하게 되었어. 그 의식이 아빠에게 위안을 준다는 걸 눈으로 보았으니까. 그게 아빠의 애도 방식인 거야. 한병철 교수가 <리추얼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한 이야기를 잠깐 들려줄게.


"장례 리추얼에서 슬픔은 공동체화됩니다. 그 리추얼은 슬픔을 견뎌내기 위한 개인의 노동을 수월하게 해주죠. 장례식은 니스칠처럼 피부 위에 덮여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피부가 참혹한 슬픔의 화상을 입지 않게 보호해줍니다."


아빠에게는 그 니스칠이 제사가 아닐까 싶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지. 하나 다행인 점은 형식에 조금 집착하던 아빠가, 이제는 마음이 더 중요함을 깨달은 것 같다는 거야. 그래서 올해 제사상이 아주 재미있었지. 피자 자리가 애매해서 배치에 좀 애를 먹었는데, 엄마가 피자가 서양 전 아니냐면서 다음부터는 전이랑 같이 올리자고 하셨어. (웃음)


제사 다음 날 아침에는 동생의 제안으로 앞산에 갔어. 

산 이름은 뭐냐고? 말 그대로 앞산이야. 이름이 귀엽지?


가족들을 앞 세우고, 뒤편에서 천천히 걸으며 나뭇잎 그림자 사진을 찍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어. 저마다 다른 초록을 가진 나무들을 오래 바라보았지.


장비를 점검하느라 잠깐 멈춘 엄마와 발을 맞춰 걷는데, 엄마가 며칠 전 다녀온 할머니 산소 사진을 보여주었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말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엄마, 아빠는 여기 앞에 묻어주면 돼."


그 말을 듣는데 단번에 슬퍼져 눈가에 힘을 주어야 했지. '응~'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대답했지만, 도움을 청하듯 주변의 푸르름을 다급하게 눈에 담았어. 그래도 기분이 금세 좋아지더라. 당연하지, 눈앞에 엄마랑 아빠, 동생이 있었으니까. 부러 오지 않은 미래를 중심에 둘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혼자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지금은 이 이야기를 적는데 조금 울 것 같아. 내가 언젠가 너한테 영원을 믿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나? 만약했다면, 너는 다정하게 웃어줬겠지.


영원을 믿는 나의 마음 아래에는 두려움이 있어.

끝을 두려워하는 마음.

꼭 누가 죽는 게 아니더라도

누군가와의 연이 끝날 때,

한 시절이 지나갈 때,

심지어 이사를 하거나 종강을 할 때도.

여행지에서 떠나올 때도

나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느껴.

어쩌면 매일매일 끝나고 있는 '오늘들'에 대해서도.


그래서 나는 오늘 네가 가진 애도의 방식에 대해 물으려고 해.


먼저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

누군가 내게 저 질문을 했을 때 적어둔 글이 있거든.


우리 그렇게 살아가자.

조금 헐겁게,

오늘이나 내일에 너무 깊게 관여하지 않으면서

우리 앞의 비극 같은 것들은 주기적으로 잊으면서

잠들지 못하는 밤의 노래처럼

그렇게 서로의 곁에 있어 주자.


온전히 혼자 맞아야 할 이별도 있겠지만

이 글을 쓸 때의 나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

아빠에게 나와 동생, 엄마가 필요했듯이.


앞으로 무수히 겪을 내 애도의 시간에 누군가 있어줬음 좋겠어. 떠나간 누군가를, 무언가를 같이 그리워할 수 있는 존재가.


'나 빼놓고 절친되는 거 아냐..?' 질투하면서도 접점 없는 두 친구를 불러 함께 노는 내 취미의 기저에는 이런 애도를 준비하는 마음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혼자여도 잘 견디고 애도할 자신이 있지만. 그냥 지금 마음은 이래. 


결아, 이제 네 이야기를 들려줘.

어떤 존재를, 어떤 시간을, 어떤 장소를 떠나보낼 때 너는 어떻게 마음을 돌보는지.

이전 01화 누구도 될 수 있지만, 아무도 아닌 결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