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영 기간: 2005년 6월~ 7월(총 16부작)
* 방영 채널: MBC (평균 시청률 30프로대, 최고 시청률 50프로↑)
* 장르: 로맨틱 코미디
* 주 시청 경로: 자취방의 21인치 텔레비전으로
2000년대 초반,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가련하고 여리디 여린 여주인공이 드라마를 휩쓸던 시절이 있었다.
<가을동화(2000)>의 송혜교, <겨울연가(2002)>의 최지우, <천국의 계단(2003~4)>의, 역시나, 최지우. 드라마를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여주인공의 상황에 푹 빠져서 눈물 콧물 빼며 이 드라마들을 시청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슬금슬금 내 안에서 '갑갑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랑, 돈으로 사겠어.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라고, 눈 부릅뜨고 말하는 원빈 앞에서,
눈물 그렁그렁한 눈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나, 돈 필요해요.."라고 바보처럼 말하는 여주 대신,
'뭐라고 이 xx야?! 돈이면 다야?!'라고 말하며, (원빈보다) 눈을 더 크게 부릅뜨고 뺨이라도 한 대 날려주는 여주가 보고 싶어졌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현진헌(현빈)이 삼순이를 향해 "얼마면 돼요?"라고 묻는 장면에서, 삼순이는 "그렇게 살지 마세요, 사장님!"이라고 대답한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라며 시답잖은 농담을 날리는 송승헌 앞에서 처량한 눈빛을 내보이기보다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라고 소리치는 여주이기를 바랐다.
조선시대 열녀도 울고 갈 정도로, 세상 떠난 남자만 죽으라고 그리워하며 곁에 있는 멋진 남자(고 박용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겨울연가>), 죽을병 걸려 세상 떠나는 순간까지, 맺어지기 힘든 오빠(권상우)에게만 순정을 다하던(<천국의 계단>) 불쌍한 여주에 싫증이 났다. 늘 주눅 들어 있는 듯한 여주의 대사톤(도대체, 왜?!)도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여주 캐릭터가 고팠다. 그러던 차에 <내 이름은 김삼순>이 짠, 하고 내 앞에 나타났으니 어찌 아니 반가울 수 있었겠는가.
서른 살 노처녀(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로, 사귀던 남친에게서 무참히 차이고, 노처녀의 까방권으로 불릴 만한 변변한 직업도 없지만, 김삼순은 늘 굳세고 씩씩하다. 태풍이 불어와도 굳건히 버틸 만한 신체와 체력으로 무장한 채, 당당한 아우라를 발한다. 돈 많고 잘 생기고, - 심지어, 재수 없게, 피아노마저 잘 치는 - 직장 내 최고 상사이기까지 한 남주 앞에서 조금도 꿇리지 않는다. 때론 남주 앞에서 쑥스러워하는 여인으로 감정을 홀로 조용히 삭히지만,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야 할 땐 (남주에게) 과감하게 호통치고, 잘난 척하는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 버린다. 십 년 묵은 체증을 날려버릴 만한, 멋지고 당당한 여주와 함께,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빵의 향기로 - 나는 빵을 너무 좋아했던 나머지, 그날 판매하고 남은 빵은 모두 직원들에게 나눠준다는 말에 혹해서 빵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 가득했던 드라마가 <내 이름은 김삼순>이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인기를 구가하며, '파티셰'라는 프랑스어가 한여름의 열기에 더해져 열풍처럼 번져나갔다. 알고 보면, 우리 주변에서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제빵사'인 이 직업이,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인생직업이 되었고, '파티셰'를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심심찮게 티브이에 등장했다.
드라마 한 회차가 끝난 후인 밤 11시 무렵이면,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같은 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틀어 놓은 채, (가을 개편으로 '푸른 밤 성시경'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사 온 빵을 뜯어먹었다. 당시에 '레오'라는 이름의, 순하디 순한 요크셔테리어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내가 빵을 먹을 때마다 녀석이 슬며시 옆으로 다가와 빵을 그러쥔 내 손만 쳐다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는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풋풋한 현빈의 모습이 담겨있다. 당시 20대 초반의 신인 배우였던 현빈은, <내 이름은 김삼순>이 히트를 치며 순식간에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 개인적으로는 <시크릿 가든>의 나쁜 남주 '김주원'이 그토록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 이전에 <내 이름의 김삼순>의 현진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27세 젊은 사장을 연기한 현빈의 매력을 한 번에 그러모은 듯한 사장실씬(사장실로 찾아온 삼순이를 올려다보는 장면)은, 소년의 이미지를 채 벗어나지 못한 그의 눈빛과 표정을 여성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각인시켰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 김자옥의 연기도 극에 생동감 넘치는 매력을 더했다. 삼순이만큼이나 씩씩하고 활기 가득한 삼순이 엄마로 분한 김자옥은, 딸들을 혼낼 때면 예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거침없이 빗자루를 휘두르고, 한편으로 딸을 위해서라면 딸의 사장에게도 서슴없이 굵은소금을 뿌려대며, 현모양처나 조강지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명랑 쾌활한 엄마 역으로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계약연애로 시작해 진짜 사랑으로 진화해 가는 이야기 중간중간 등장하는 김선아 배우의 내레이션도 자연스럽게 극 중에 스며들었다. 내레이션이 어색한 배우들은 곧잘 극의 몰입도를 현저히 떨어뜨리곤 하는데,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파티셰를 다루는 드라마에 어울리게, 내레이션 또한 극의 진행과 함께 잔잔하고도 따스하게 흘러갔다. 클래지콰이가 부르는,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로 시작하는 주제곡 또한 드라마가 종영한 이후로도 꽤 오랜 시간 귓가에 맴돌 정도로 강렬했다.
비바람 부는 한라산 정상에서 주인공들이 나눠 먹는 초코파이와 미역국을 보면서는, '나도 이다음에 꼭 저런 데이트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고(지금껏 내 생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_-), 드라마의 마스코트처럼 등장했던 돼지 인형 신드롬에 휩쓸려 크기별로 돼지 인형을 사모으기도 했다. (그 무렵 명동을 나가면 노점상마다 돼지 인형들이 그득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마지막 화에서 삼순이와 삼식이(현진헌의 극 중 별칭)가 함께 남산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다. 유난히 무더웠던 2005년 여름, 에어컨 없는 자취방 구석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건만, 오래도록 뇌리에 새겨질 라스트 신을 연출하고자, 뙤약볕 아래에서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는 주인공의 땀에 젖은 셔츠 뒷모습을 보며, 배우도 극한 직업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사랑하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내 마음을 건드리던, 나지막이 읊조리는 주인공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곱씹어보며, 나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을 꿈꾸었다.
그렇게 나는, 유난히 무더웠던 그해 여름을 천천히 통과하고 있었다..
- 드라마 관련 짧은 에피소드 하나
그해 여름, 나는 교환학생으로 온 중국인 친구와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 가서도 드라마 본방을 사수했는데, 드라마를 함께 보던 친구가 현빈을 보며, 묻지도 않았는데 굳이, ‘전혀 잘 생기지 않다'라고 말했다. 잘 생기고 못 생긴 건 개인 취향이고, 딱히 내가 현빈 팬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우리나라 남자 배우 인물이 별로라고 말하니 빈정이 상했다. 쓸데없이 '글로벌 인물 경쟁심리'가 발동했다고나 할까. 내가 보기엔 중국 드라마 속 남자 배우들이야말로 하나같이 느끼하고 별로였는데.. 자칫 신경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그 여름 제주도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여름 들녘 너머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