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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Dec 08. 2023

장 과장에 의한, 장 과장을 위한 <하얀거탑>


* 방영 기간: 2007.1.6.~3.11. (20부작) / (리마스터링 재방) 2018.1.22.~3.15. (40부작: 회차당 2부로 구성)

* 방영 채널: MBC

* 장르: 의학 드라마 / 원작: 동명의 일본 소설

* 주 시청 경로: 거실 티브이로 본방 사수함


개인적으로 <햐얀거탑>이 의학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드라마에는 이전 의학 드라마에서 흔히 큰 이야기 줄기를 차지하고 있던 러브라인이 없다. 물론, 주인공인 장준혁(김명민)과 그의 애인 희재(고 김보경)가 등장하기는 한다. 그러나 둘 사이 사랑의 감정은, 드라마가 막바지로 치달을 때까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하얀거탑>에서 핵심적인 흐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더러운 정치판에서나 볼 수 있는 각종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이다. 이를 통해 드라마는 권력을 탐욕하는 한 인간이 양심을 저버리고 어느 정도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까발려준다. 즉, <하얀거탑>은 의학 드라마를 표방한 정치 드라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제껏 여러 의학 드라마를 보았지만, <하얀거탑>만큼 몰입해서 보았던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일단, 주인공 장준혁 과장(이하 장 과장) 캐릭터 자체의 매력도와, 이 배역을 맡은 김명민 배우의 연기력이 치명적이다.

원래는 배우 차승원에게 돌아갈 뻔했던 역할이었다고 하는데, 만약 차승원이 장 과장을 연기했다면 이만큼의 파급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만큼 김명민은, 비록 악역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오히려 시청자로부터 동정과 공감을 얻는 매력적인 악역, 장 과장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최고 시청률 20.8%, 평균 시청률 10%대의 드라마 <하얀거탑>이, 시청률 이상의 거센 후폭풍을 몰고 오는 데 가장 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배우 김명민의 연기였다. 역할과 너무나도 잘 어우러지는 김명민만의 굵직한 저음으로 명확하게 전달되는 대사들, 장 과장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섬세한 표정과 내면 연기는, 김명민이 지금까지 연기했던 모든 역할들을 - 심지어 연기대상을 받았던 <불멸의 이순신>의 이순신 역마저 - 잊게 만들 정도로 흡인력이 대단하다.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든 모습을 보여 준, 장준혁 역의 배우 김명민

나는 <하얀거탑>을, 임용고시 수험시절에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그 짧은 순간 배우 김명민의 연기 하나만 보고도 ‘이 드라마 뭐 있다'는 삘을 받았고, 그 이후로 수험생 신분임을 망각한 채 성실한 본방 사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단한 하루의 수험 생활을 마감하면, 나는 맥주 한 캔이나 막걸리 한 잔을 꺼내 들고 반려견과 거실 소파 한켠을 차지한 채, 설레는 마음으로 <하얀거탑>의 본방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힘든 하루의 끝을 버티게 해 주었던 드라마였던 만큼 한 회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당시 서울과 지방으로 떨어져 지내던 나와 짝꿍은, 드라마를 보고 나면 핸드폰으로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신나게 나누곤 했다. 그러니까, <하얀거탑>은 우리의 청춘 연애사에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던 드라마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얀거탑>에 빠져들었던 나는, 동명의 일본 원작 소설의 번역본을 사 읽고, 급기야 일본판 <하얀거탑>을 컴퓨터에 다운로드해 보기에 이르렀다. 일본 버전의 드라마를 보면서는 '역시, 우리나라가 드라마를 잘 만드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 일본만의 그 과장된 감정 표현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고,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어쩐지 배우들의 연기력과 인물도 떨어져 보였으며, 잊을 만하면 자꾸 땅바닥에 넙죽넙죽 엎드려 비굴하게 절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통에 심기가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은 나름 재미있게 읽었지만, 한국판 <하얀거탑>만큼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스토리는 아니었다.



<하얀거탑>에서 긴장감 넘치는 내밀한 대화는, 주로 일식집 신에서 펼쳐진다.

병원 내 기득권들 간 모종의 계략들이 음흉스럽게 드러나는 일식집 신은, 배우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인물 간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사소한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각 인물의 숨겨진 욕망을 시청자들이 엿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이와 대비되는 드라마 배경으로는, 장 과장의 내연녀, 희재의 와인바가 있다. 와인바는 장 과장이 주로 부하 직원인 의국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곳인데, 그는 이곳에서 이뤄지는 대화를 통해 부하 직원들을 지능적으로 조종하며, 병원 내 권력 암투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내곤 한다.

(위) 희재의 와인 바 (아래) 일식집에서의 작당모의 장면. 카메라 앵글이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명품 대사와 인상 깊은 OST도 드라마의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한다.(지금도 <하얀거탑> OST를 방송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기억에 남는 대사는, 우용길(김창완)의 "휴머니즘이 있으시니까~", 오경환(고 변희봉)의 "자격을 갖춘 후보자에게 한 표를 쓰겠다" 이주완(이정길)의 "넌 인간이 덜 됐으니까~" 등이 있다. 이 대사들의 공통점은 인간성을,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논한다는 것이다. 10년도 훨씬 더 전에 방영된 드라마를 다시 톺아보며, 각자도생의 삶으로 내몰리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진 지점이다.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장준혁과 희재의 마지막 전화 통화 신장준혁이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과연 장 과장과 희재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저 흔하디 흔한 불륜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내게, 죽음을 앞둔 장 과장과 희재의 마지막 통화 신은, '서로를 향한 그들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그만큼 서로를 애틋해하는 마음이, 절제된 대사를 타고 가슴 아리도록 절절하게 와닿았던 장면이었다.



출세를 위해 폭풍처럼 질주하던 주인공의 삶이 한순간에 속절없이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인간의 간절한 욕망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달으며 깊은 허탈감에 빠졌고, 한동안 그 마음이 후유증처럼 남아 나를 아프게 했다. 장준혁 역할을 맡았던 배우 김명민도 배역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드라마 종영 후 한동안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괴로운 마음에 시달렸다고 한다.

준혁과 희재의 마지막 통화 신. 절제된 대사가 오히려 절절한 마음을 극대화해 전달한다
진짜 곧 죽을 사람 같은 김명민의 명연기에 눈물 주루룩 했는데, 왠지 그의 모습이 청초(?)해 보이더라는.ㅎ

드라마를 보며 장 과장을 순간순간 미워하면서도 결국 혐오하지는 못했다. 의사 집안 출신인, 곧고 선한 친구 최도영(이선균)에게 “너는 결코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장 과장에 대한 애잔한 마음까지 일었다. '출세의 사다리'가 거의 무의미하다시피 한 지금의 우리네 현실에서, 남을 밟고 일어설 만큼 비열하고 처절해지지 않는 한, 평범하거나 그 이하의 배경을 가진 인간이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길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회의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얀거탑>은 첫 방영 종료 11년 후 MBC에서 리마스터링 본으로 재방송되었는데,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흐른지라 그 사이 내 상황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첫 방영 때는 미혼에 혈혈단신이었던 내가, 두 번째 방영 기간에는 초등학생 아이가 있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 짝꿍도 그 사이 아이 아빠가 되었고, 우리는 거실에서 (때때로 술 한 잔 걸치며) 리마스터링본을 함께 보았다.



그러는 중에 내 평생에 잊기 힘든 짝꿍의 모습을 훔쳐보게 되었다. 환자로 분한 아역 배우가 죽음을 앞둔 연기를 하는 장면을 보며 짝꿍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옆모습을 말이다.

  "왜 울었어?"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짝꿍이 대답했다.

  "OO이 생각나서. 내가 아빠가 되긴 했나 봐..."

짝꿍은, 당시 아역 배우와 비슷한 나이였던 딸아이를 생각하며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했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는 그렇게 엄마와 아빠가 되어 철이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이긴 하다.)



지금 우리 집 외장하드에는 여전히 <하얀거탑> 전편이 들어있다. 언제고 다시 1편부터 정주행 할 수 있게끔 말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금 생각해 봐도, <하얀거탑>은 역시 장 과장에 의한, 장 과장을 위한 드라마인 것 같다. 머지않은 시간 그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어지면 술 한 잔 기울이며 장면과 대사들을 다시 꺼내보아야겠다. 그때쯤엔 딸아이도 우리와 함께 하기를 소망해 본다.


https://youtu.be/NpBfY5DPruA?si=HtnVsKTDzevodyr7

묵직한 전주에 이어지는 애절한 바이올린 선율이 드라마의 주제와 분위기를 잘 드러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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