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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Dec 29. 2023

이토록 고급진 불륜이라니, <밀회>

*방영 기간: 2014년 3월 ~ 5월(총 16부작)

*방영 채널: Jtbc

*장르: 로맨스

*주 시청 경로: 거실 티브이(본방, 재방 + 넷플릭스)


클래식은 섹시하다.


한 인터뷰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한 말이다. 그의 말에 공감한다. 클래식을 들으면 어쩐지 우아한 시폰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떠오른다. 바람결에 속살이 비칠 듯 말 듯한 아름다운 자태의 여인이. 전라의 몸이 아닌, 치파오 아래로 슬며시 드러나는 관능적인 하이얀 다리처럼, 클래식은 결코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놓고 보여 주지 않는다. 때로는 격정적인, 또 때로는 눈물이 차오를 만큼 감성적인 선율 뒤에 치명적 관능미를 숨기고 있다. 그렇기에 더 우아하게, 섹시하다.



양인모의 인터뷰를 들으며 나는 몇 해 전 본 드라마 <밀회>를 떠올렸다.

가난하고 순수한, 스무 살의 피아노 영재 '선재(유아인)', 상류 사회의 온갖 추잡한 일을 겪으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마흔의 '혜원(김희애)'. 그리고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인 피아노. 대략적인 드라마 설정만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불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진다. 실제 극본을 맡은 정성주 작가는, 불륜을 다룬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타워>에서 이야기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클래식의 관능미를 제대로 엿볼 수 있는 장면 (2화, 혜원과 선재의 듀엣연주)

불륜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단지 드라마 속 혜원과 선재의 감정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들의 대사를 통해 기어이 전해지는 그들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사회적 통념상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기까지의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야 만다. 젊은 시절 출세욕에 휩싸여 내린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심장이 모래주머니가 되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마흔이 되어버렸다며 절망하는 혜원의 눈물에 공감한다.



혜원의 모습에서 <하얀거탑>의 장 과장을 떠올린다. 흙수저의 삶에서 벗어나 더 높은 곳을 향해 질주하던 장 과장의 욕망이 '죽음' 앞에서 허망하게 끝이 났듯, 혜원의 간절하고 교활했던, 상류사회를 향한 욕망은 선재의 거침없고 순수한 '사랑' 앞에서 남김없이 무너진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선재 앞에 선 혜원의 모습에서, 인간이 선택한 어떤 숭고함을 느낀다. 절대적 힘을 가진 죽음 앞에서만큼 숙연해진다. 사다리의 상층부로 오르기 위해 쌓아왔던, 하지만 자신을 지켜주던 더러운 것들을 뒤로하고, 모래주머니 같은 심장 대신 뜨겁게 팔딱이는 심장을 택한 혜원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어쩌면 드라마이기에 나의 이 모든 감정이 가능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9화) 혜원의 첫 고백이 담긴 내레이션이, 선재와 혜원의 애절한 모습들 위로 흐른다.

혜원은 말한다.

"(선재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도 아니고...(선재는) 그저 (나를 위해) 정신없이 걸레질을 하고 깨끗한 앉을자리를 만들어 줬지만, 내 생애에 그런 정성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을 성공의 도구로 여기고 학대했어요..."

이런 혜원을 향해 선재가 말한다.

"제 자신이 극혐이었을 때, 마음이 흔들렸을 때, 선생님(혜원)이 날 잡아줬어요.. 제 연주를 한 번 더 들어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거 진짜 셌어요. 남자는 그럴 때 키스해요..." 그럼에도, 자신을 억지로 밀어내려는 혜원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는다.

"(선생님은) 그냥 저 사랑하시면 돼요. 밑질 거 없으시잖아요. 분명 제가 더 사랑하는데..."

여기에는 그 어떤 계산도, 주저함도 없다.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돌진하는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선재는, 상류층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능숙하게' 설거지하며 사는 혜원에게, '스스로를 불쌍하게 만들지 마라'라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나는 그들의 마음이 흔들리고야 만 그 지점에 온전히 녹아든다. 이기적인 본성을 거스르고 기꺼이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이란 무릇 이러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껏 재미있게 본 드라마들은 꽤 있었지만, 내 감성과 감정을 뒤흔든 드라마는 드물다. <밀회>는 그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선재가 연주하는 '작은 별 변주곡'을 들으며 오열하는 혜원을, 혜원을 남기고 돌아선 골목길에서 절규하듯 울음을 쏟아내는 선재를 보며 나는 함께 울음을 토해냈다. 드라마 전반에 등장하는, 가슴을 찢을 듯 휘몰아치는 클래식과, 세미클래식에 가까운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은, 부드러운 마호가니 색감의 드라마 장면들과 어우러져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오래도록 남았다. 김희애의 긴 포니테일 머리 아래에서 빛나던 이마와 우아한 패션도, 스물아홉의 나이에 풋풋한 스무 살 청년의 감정을 너무도 잘 그려낸 유아인의 연기도, 드라마가 담고 있는 페이소스에 오롯이 녹아들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 콕 집어 얘기할 수 없을 만큼 마음에 남는 장면들이 많지만 - 2화의 마지막, 영재가 어둠이 내린 한강 다리 위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 3악장을 연주하는 모습과, 9화에서 혜원이 처음으로 영재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내레이션 파트, 그리고 마지막 화에서 영재가 감옥에 있는 혜원을 그리며 모차르트의 ‘론도'를 연주하는 장면이다.

(2화) 이곳에 있는 아느 누구도 감지하지 못하는 열정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선재. 건너는 이 하나 없는, 차디 찬 다리 난간 위에서 선재의 베토벤 '열정'이 돌풍처럼 질주한다.

칠흑 같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차가운 한강 다리의 난간 위에서, 격정적으로 춤추는 두 손으로, 혜원과 피아노로 가슴 뜨겁게 공감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연주하는 선재의 모습에서, 앞으로 혜원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질주할 것인지 예감할 수 있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 속에서도 삶에 대한 열의와, 삶이 지닌 아름다움을 기어이 발견하고 예찬하는 가없이 고귀한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혜원과 선재의 내레이션 장면에서는, 그들의 글과 연주 속에 담겨 있는, 열 마디 말보다 깊이 와닿는,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에 마음이 저릿해졌다.

클래식에는 절망과 환희가 오간다.

클래식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느끼기 힘든, 인간의 극한적 감정인 '환희'와 '절망'이 깃들어있다. 그렇기에, '삶의 정수'와도 같은,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완벽히 공유하는 두 남녀사이에서, 우아한 관능적 욕구가 불붙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손 한 번 잡지 않은, 속살조차 보여주지 않은 상대방이 '겁나게 섹시한 당신'으로 다가오는 것은, 천상의 작곡가들이 선사해 주는 선물과도 같다. 마침내 그 선물을 받아들인 혜원과 선재가, '사람 갖고 장난하는' 잘나신 상류층 인간들에게서 벗어나 뒷골목 공사장에서, 낡은 오토바이 위에서 사랑을 노래하며 서로의 가여운 삶을 어루만진다. '특급 칭찬'에서 시작된 서로를 향한 작은 관심이, 모든 것을 내던질 만큼 거대하고 숭고한 감정으로 승화된다.



이야기가 끝에 가까워질 때쯤의 나는, 그들의 앞날에 핑크빛만이 가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세의 욕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가여운 한 인간으로서, 사랑을 선택한 그들의 결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불륜을 미화시킨다'는 생각보다 '잘못된 선택을 피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애처로움'으로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소망한다. 그들의 만남이 더 이상 '밀회'가 아닌, 햇살 가득한 벌판에서 자유로이 이루어지는 인연이기를..

지금껏 가졌던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드는 사랑이 있기에.

- 드라마 <밀회>와 함께하는 알쓸신잡 -


1. 7화. 혜원과 선재의 한밤 드라이브 씬 이후에 등장하는 교외의 한 모텔.

선재는, 피곤해하는 혜원을 걱정하며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잠시 쉬어갈 만한 모텔을 찾는다.

나와 짝꿍은 여기 등장하는, 샛노란 조명이 눈에 띄는 모텔을 가족 여행을 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했다. (99퍼센트 이 모텔이 그 모텔이라고 확신한다) 드라마가 방영했던 같은 해 가을, 우리는 아이들, 동생 커플과 함께 '송암 스페이스*'로 별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드라마의 배경과는 다르게 낮이었지만, 드라마에 심취해 있었던 나와 짝꿍은, 스치듯 지나가는 모텔을 순간포착하고 거의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마치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사람들처럼.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가족 단위로 별 보러 가기 좋은 곳)


"이야~~~ 여기, 드라마 <밀회>에 나왔던 그 모텔이네!!!"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렇게 소리치는 우리 부부를 보며, 아마도 동생 커플은, 모텔보고 왜 저리들 난리법석인가, 싶었을는지도 모르겠다.

말이 나온 김에, 유아기 자녀가 있다면 아이와 함께 방문하기 좋은 장소 한 곳을 추천하고 싶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장흥아트파크'가 바로 그곳이다. 아이들이 놀기에도, 어른들이 잠시 머물며 심신을 쉬어가기에도 좋은 곳이다.(우리가 갔을 당시에는 미술작품 전시도 하고 있었는데, 몹시 들뜬 마음이었던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미술작품을 우리 돈으로 구입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짝꿍과 동시에 환호를 보낸, <밀회>에 등장하는 노랑노랑한 밤의 모텔

2. 배우 유아인은 <밀회>를 찍을 당시 영화 <베테랑> 촬영을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골프채를 휘두르며 사이코처럼, "어이가~ 없네."라고 말하다가,

동시에, 순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순수 청년을 설득력 있게 연기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일까 놀랍기만 하다. 극과 극을 오가는 캐릭터에 완벽히 빙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감정의 파고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배우로서의 숙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요즘 그의 행보를 보면, 그의 작품들을 관심 있게 지켜본 시청자 중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3. 개인적으로 '찌질한' 캐릭터를 가장 잘 연기하는 배우가 박혁권이라고 생각한다.

1차 적으로, 그가 아주 잠시 등장했던 영화 <반두비>에서 ‘찌질함 그 자체’인 그의 연기에 깊이 감명(?) 받았으나, <하얀거탑>의 말없고 성실한 의사 역할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밀회>를 보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드라마 <마인>을 보면서는 급기야 그의 완벽한 찌질 캐릭터에 물개박수가 나올 지경으로 감탄하고야 말았다.

내 생애 최고의 드라마 OST. 오리지널과 클래식 두 파트로 나뉘어있는데, 들을 때마다 드라마 속 격정적 감정을 되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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