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다른 음식을 잘 먹느냐면 그것도 아니지만, 특히 고기반찬이 싫다고 했다.
사실 난 같이 살면서도 엄마가 먹는 것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하루 두 끼, 어쩔 땐 세끼 아이들에게 해 먹일 반찬 걱정이 내 일상의 주된 근심거리였고 엄마의 먹거리는 내 주요 관심사 저 너머 경계선 어디쯤에 있었다. 엄마는 엄마니까, 어른이니까 어련히 알아서 챙겨 먹을 테지, 내가 편한 대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엄마는 그냥 배고프지 않을 만큼, 생을 이어가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만 음식을 섭취하고 있었다. 단백질이니 식물성 섬유니 하는 것들의 균형을 맞춰 먹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못한 채.
매끼 손주들이 잘 챙겨 먹는지, 내가 밥을 너무 적게 먹는 건 아닌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 쓰면서 정작 본인의 끼니는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도 아이들 끼니를 챙겨줘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대충 먹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성장을 멈춘 지 오랜 신체, 허기만 채울 수 있다면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준비하는데 드는 시간에 차라리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큰 탓이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엄마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나는 아직 활동량이 많은 40대지만 엄마는 평균 속도로 걷는 것 마저 힘겨워하는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진화론에 등장하는 현생 인류의 조상처럼, 굽어가는 엄마의 등과 힘없는 걸음걸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간 나는 엄마가 먹을만한 고기를 찾기 위해 정육 코너를 기웃거렸다.
때마침 마트에서 고기 할인 행사를 하고 있었다. 핑크빛과 선홍빛의 각종 맛깔나 보이는 고기들 사이에서 유독 포장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실크를 연상시키는 육질...'
‘실크’라는 단어가 주는 부드러움과 고급진 감성에 어우러진, 보들보들해 보이는 고기의 자태에 마음이 동한 나는 망설일 틈도 없이 하나를 냉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렇게 저녁이 지나갔고, 나는 고기맛이 어땠냐고 엄마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보았다.
"고기가 참~ 부드럽고 좋네. 잘 먹었다."
엄마는 '맛있다'는 말보다 '부드럽다'는 말로 고기맛을 표현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밝았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는 고기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지 질긴 고기가 부담스러웠을 뿐이라는 것을.
그때 보일 듯 말 듯 엄마의 앞니가 내 눈에 들어왔다. 부서져버린 본래 이를 대신해 들어앉아있는 6개의 이들이.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어느 밤, 술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를 피해 달아나다 2층집에서 골목길로 뛰어내렸다. 살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밤의 기억은 내게도 여전히 생생하다. 그날 엄마는 튼튼했던 앞니 6개를 잃어버렸다. 보철을 했지만 엄마와 함께 오랜 세월을 버텨온 그 이들도 이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묻어버리고 싶은 기억은 머릿속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다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일상의 어느 순간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와 마음을 휘젓곤 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엄마가 잘 씹을 수 있는 고기를 찾아내어. 그날의 기억을 조금은 덜 떠올릴 수 있게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