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숲 속에 나 말고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다
나는 소설가 지망생이고, 아내는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다.
그건 꿈이고, 자본주의 세계에서
나는 작은 중소기업 직장인 아내는 전업 주부이다.
올해는 유난히 쉬는 날이 많다. 이번에도 4일이나 연휴가 계속되었다.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지만, 우리 부부는 카페로 왔다.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
저가형 카페다.
그곳에서 벌써 여덟 번째 승리 메시지를 봤다. 8연승이라니. 대기록이다. 최근에 이렇게 많이 이긴 적이 있었던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기쁨의 환호가 아니라, 비명을 지르고 싶다는 점이 아이러니지만.
으아악. 사람 살려, 하고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싶다.
참 평온한 카페다.
사람들은 수다를 나누거나 각자의 태블릿과 노트북을 바라보며, 쉬는 시간도 없이 뭔가에 매진하고 있다.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피하고 있다. 미래도, 현실도. 태블릿에 갇혀 작은 승리의 기쁨. 도파민의 분출. 8연승. 거기에 매달리고 있었다. 마약 주사를 찌르듯, 게임의 승리를 주사 바늘 삼아 찌르고 있다.
현실에서, 승리는 게임에서만 맛볼 수 있다. 새로 이직한 회사의 4분기 판매 전략을 짜야 하지만, 도무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애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게임을 켰다. 전설 속의 영웅들 10인이 소환되어 5 대 5로 소환사의 협곡에서 싸우는 게임.
너무 많이 했는지, 눈앞이 흐릿하다. 최근에 노안이 왔다. 마흔에 벌써 노안이라니.
모니터를 열심히 쳐다봐야 하는 일의 특성상, 혹은 일보다 더 게임을 한 덕택에 얻은 훈장인지도 모르겠다. 난시가 심했는데, 더 나빠졌다. 타자를 치고 있지만, 써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희뿌연 글자들. 써지고는 있으나, 보이지 않으니, 읽을 수 없다. 저것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보이지 않는데, 희뿌연 빛의 실뭉치로 밖에 안 보이는데, 의미가 있는 걸까.
치고 있으니까, 제대로 입력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살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난시라서, 노안이라서, 인생에 나라는 의미가 어떤 글자로 새겨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만하자, 이제 그만. 게임을 너무 많이 했다. 한 판에 30분이 넘는다. 벌써 4시간 가까이 게임을 했다.
아내는 앞에서 대본을 고치고 있다. 벌써 4시간째, 손톱을 씹으며, 잘근잘근.
찡그리기도 했다가, 웃기도 했다가, 입술을 오므렸다가, 혀로 이 안쪽을 쭉 훑기도 하고, 표정이 다채롭다. 대본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표정이 아내의 얼굴을 빌려 순간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타다닷, 탓탓, 리드미컬하게 타자를 친다.
애쓰고 있구나, 싶다.
하지만 어쩌면,
아내도 딴짓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의심해 본다. 나만 흐릿하게 사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내도 역시...
슬쩍 화장실을 가는 척 아내의 등뒤를 돌아가면서 화면을 본다.
화면에는 #1 #2, 와 같은 넘버링이 되어 있고, 한글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다.
나와는 달리, 아내는 본인의 일에 열심인 것이다.
의심해서 미안.
처음부터 게임을 이렇게 많이 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많이 이길 생각은 없었다.
나한테 진 패자들이여 미안.
피하고 싶었다. 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 있는데, 잘할 자신이 없어서, 아예 안 해 버리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예 안 하면, 잘하는 것도 못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안 하는 것은 안 하는 것이니까. 진짜 실력은 숨길 수 있을 테니까.
치밀한 계산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머릿속을 고무장갑 뒤집듯, 까 뒤집어서, 그 안에 단단하게 박혀 있는 네거티브와 에러의 로직을 끄집어 내보면, 대개 그렇다.
휴일이 길면, 길수록, 피하는 시간은 길어지고, 안 해 버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진짜 인생을 외면할수록, 마음 한 구석에 뿌려진 불안의 씨앗은 싹을 틔운다. 이런 시간들은 불안의 씨를 거대한 불안의 나무로 키운다.
불안의 나무에서는 불안의 열매가 맺히고, 불안의 열매는 곧 네거티브한 생각의 땅에 떨어진다. 불안의 열매 속에 있던 씨는 네거티브한 양분을 잔뜩 끌어모아서, 금방 또 자란다.
불안의 나무는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은 넷이 되고, 수백이 되고, 수천이 되고, 수만의 불안의 나무들이 모여, 숲이 된다, 불안의 숲.
휴일이 길면, 제모를 제때 안 하는 것처럼 불안이 불어나 숲이 된다.
불안의 숲에서 벗어날 방법을 아직 나는 찾지 못했다.
예전 생각이 난다. 회사를 안 나갔다. 불안하고 불안해서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회사로 다시는 출근하지 않았다. 무서웠다. 연말이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날. 새해가 되고 출근을 다시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침 그때는 코로나가 이제 막 문제되던 2020년 1월.
한참 공황이 심해져, 회사 빌딩 근처에만 가도 숨을 쉴 수 없었다. 저 공간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웃기게도 당시 회사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회사에서 10분 거리에 살았다. 언제라도 회사가 필요로 하는 순간,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가까운 거리에 살았지만, 공황이 심해진 후에는 일부러 돌고 돌아, 10분 거리를 1시간 만에 가고 그랬다. 회사가 보이지 않는 골목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새해의 첫날, 머릿속에서 코로나 사건은 좀비 아포칼립스처럼 확대되었다. 세상이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가지 않았다. 집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인생을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 비대면 속으로 도망갔다. 비대면의 긴 휴일 속에서 불안은 그 어느 때보다 심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휴일이 길면 불안이 심해진다. 휴일이라도 뭔가를 하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놀든, 일하든, 배우든.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빨빨거리면서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의 숲 속에 사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카페에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프로그램을 짜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수다를 떨거나.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불안의 숲에서 불안을 태우는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니까, 비로소 노트북을 펼 수 있었다. 비로소 진짜 해야 할 일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 애써 하려고 하지 말자.
불안의 숲 속에 나 말고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다. 어떻게든 다 같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붉고 검은 불안의 숲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