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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남 Oct 27. 2024

불안할 땐, 두려움 리스트

불안의 숲에서 사는 법 - 두려움 리스트 작성하기


무엇이 당신을, 그리고 나를 불안하게 할까?



영화 <미스트> - 안개 속엔 뭐가 있을까?


불안은 안개 같다. 영화 <미스트>를 봤는가? 세상을 뒤덮은 안개 속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작고 약한 강아지일 수도 있고, 거대한 괴물일 수도 있고, 미녀일 수도 있다. 대략 예상은 할 수 있지만, 알 수 없다. 불확실하다. 막연한 상상과 막연한 상상에 대한 막연한 리액션. 무서워해야 할지, 도망가야 할지, 안아줘야 할지, 그 대상이 명확해질 때까지는 알 수 없고, 정할 수 없다.


불안의 대상은 그렇기에 모호하다. 확실하지 않고, 확정되어 있지 않다.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차라리 상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을 구체화해 보면 어떨까?


불안과 두려움의 차이는 대상의 명료함이라고 한다. 불안은 뚜렷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 고통받는다. 위협을 하는 것들이 있지만, 안개 속 괴물처럼 흐릿하다. 잘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이것들에 이름표를 붙여서 명확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어떨까? 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어떻게든 이름표를 붙여 보는 것이다.


응, 혼자 있을 때, 식은땀이 흐르고, 등을 타고 전기가 올라오는 것 같은 감각.
이건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이야.


구체적인 대상을 상정한다. 당장은 더 무서울 수도 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흉측한 고스트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상황과 같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왜 이렇게 스산한 기운이 감돌지. 왜 이렇게 춥지?
 
영화 <식스센스> - 입김이 나오면 뭔가 있긴 있는 거다


고스트가 옆에서 찬 입김을 부는지도 모르고, 왜 이럴까, 의문이 든다. 고스트가 보이지 않으니까 알 수 없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까 볼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바로 옆에 고스트가 있고, 찬 입김을 불고 있어서 추운 것이라고 상정해 버리자.

당연히 고스트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에어컨을 틀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왜 이럴까, 답 없는 질문을 던지면서, 불안한 상태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고스트 때문이다, 제길.' 이렇게 생각해 버리면, 그다음 행동이 명확해질 수 있다. 부적이라도 써야겠다든가. 고스트 버스터즈를 불러야겠다든가.


거꾸로 생각해 보면, 불안은 두려움이 스텔스 기능이 있는 특수복을 입은 것과 같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입고 있다. 불안을 벗기면, 그 안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써 본다.

버킷 리스트나 위시 리스트가 아니라 두려움 리스트.

죽을 때까지 버킷리스트


반대로 생각하면, 이것들만 피하고, 도망 다니면, 삶이 보다 안전하지 않을까?

자, 눈을 감고 떠올려 보자. 어떤 상황이 되면, 숨 막히고 안절부절 못하게 될까?



가장 먼저 머릿 속에 떠오르는 4대 大 두려움 악마

1. 고독 - 다 떠나버릴까 두렵다.

2. 노화 - 늙어서 약하고 추해지는 것이 두렵다.

3. 의미 - 애쓰면서 다 살았는데, 당신의 인생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할까 봐 두렵다.

4. 가난 - 직장을 잃고, 가진 돈이 바닥나고, 길거리에 나 앉아, 배를 곯다가 죽을까 봐 두렵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떠오르는 두려움 악마들.


1. 너무 많이 먹어서 살찌고 뚱뚱해서 몸을 누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숨 쉬기도 버거워져 추하게 죽을까 두렵다.


2. 당뇨병에 걸려 당수치가 갑자기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한다. 합병증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을까 두렵다.


3. 어느 날 상사가 넌 도움이 안돼! 능력이 없다. 줄 돈이 아깝다. 오늘 당장 나가줬으면 좋겠어! 사실 난 능력이 없고, 능력이 없는 게 기어코 들켜, 회사에서 해고당할까 두렵다.


4. 사랑하는 아내가 어느 날, 도저히 너랑은 같이 못 살겠다, 쓰레기 같은 새끼, 싫어. 미워! 꺼져!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고, 떠날까 무섭다. 이혼당할까 무섭다.


5. 길을 걷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돌더미가 떨어진다든가, 급발진 차에 치인다든가, 준비가 안 되었는데, 갑자기 준비 없이 죽는 것이 두렵다.


6. 점점 건망증이 심해지다가, 치매에 걸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고,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세상이 온통 낯설고 두려울까봐, 아무것도 모르게 될까 봐 무섭다.


7. 병에 걸린다.


8. 굶어 죽는다.


9. 식중독에 걸려 죽는다.


10. 대장암에 걸려 죽는다.


11. 연쇄살인범이 갑자기 나타난다.


12. 사람들이 나를 혐오한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는데, 무해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는데, 피해를 준다고, 제발 나가 죽으라고 할까 무섭다.


13. 책을 한 권도 쓰지 못하고 죽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으면서 책 한 권 내지 못하고 살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지 싶을까, 텅 빈 우주에 떠다니는 것처럼, 완전히 허무해지는 게 무섭다.


14. 괴한들이 나타나 얼굴을 때리고, 또 때린다. 코피가 흐르고, 눈물이 흐르고, 앞니가 부러진다. 퉁퉁 부어서 앞도 보이지 않는데, 뇌를 통째로 흔들고, 삶 자체가 날아버릴 듯한 거대한 고통이 둔탁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살이 아프고, 뼈가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가 죽을까 봐 무섭다.


15. 완전히 망해서 집이 없다. 영하까지 떨어지는 날씨에 신문지나 종이 박스, 버린 옷가지를 입고 버텨야 한다. 하루는 이렇게 살 수 있지만, 대로 살다 죽을까 무섭다.


15. 서울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나를 알고 있다. 어딜 가나 욕을 하고 침을 뱉는다. 누구도 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지 않는다. 혐오스러운 인간 취급을 받을까 무섭다.

.

.

.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막상 써보니, 생각보다 쓰기 어려웠다.

생각보다 지금 상황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 혹은 미리 준비하거나 대비할 수 없는 불시에 일어나는 일들,

최악의 수를 두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쓰다가 생각해 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들. 고민하고 두려워한다고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제한되어 있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나아졌다.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어차피 할 수 없다.


두려움 리스트를 작성하고, 만트라를 외우며,

불안의 숲에서 또 하루를 견딘다.

생은 또 이어진다.

(임시방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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