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숲에서 약을 먹는다
불안해도 괜찮아. 어차피 안개 같은 거야. 나를 죽일 수는 없어. 내가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약을 끊었다.
그러지 말라고 했다. 의사는 적절한 시기가 오면, 상담을 거쳐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이 되면, 먹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올 거라고. 그때까지는 계속 먹어야 한다고. 자기가 혼자 판단해서 약을 끊으면 위험하다고. 순남 님같이 불안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아서, 예상하기가 어렵다고.
지금은 어디로 튈지 알 것 같고, 통통 안정적인 범위에서 튀는 것처럼 보인다고. 그런데 아스팔트에 부딪치는 면이 조금만 달라져도,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럭비공이 마음의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닿는 면이 조금만 달라져도, 안정 범위 밖으로 튀어나갈 수 있다고. 그래서 약을 먹는 거라고. 럭비공 같은 타원형을 둥글게 둥글게, 축구공처럼 원에 가깝게 만들어주니까. 조금 기력이 떨어지고, 기운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다 원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니까, 함부로 끊지 말고 참고 먹으라고.
물론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의사의 말을 해석해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래서 절대 끊으면 안 되고, 끊는 걸 허락할 수 없고, 계속 먹어야 한다고.
몇 년 동안 그 말을 들으면서 꼬박꼬박 약을 먹었다. 밥처럼. 하루 두 번. 아침과 저녁.
의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제 때에 병원을 가지 않아서 약을 못 탔을 때 발작이 일어났다. 특히 약을 먹지 않았는데, 과부하가 걸리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상사가 미친놈처럼 짖어 댄다거나 마케팅 성과가 좋지 않을 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더 완벽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 행동을 실행하지 못할 때.
누구나 그런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회 생활하고, 일을 하다 보면 그럴 때가 반드시 있는 법이니까.
약을 먹고 있을 때라면, 플라시보 효과도 있어서 그런지, 참을만하다. 약을 먹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일을 맞닥뜨리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이 번갈아가면서 덮친다. 그 야말로 야생동물처럼 덮친다. 길을 걸어가고 있어. 산을 넘어가고 있어. 그런데 갑자기 곰이나 늑대 같은 야생동물이 나타났어. 죽은 척해야 할까. 발길을 돌려 내려가야 할까. 에라 모르겠다.
약을 먹었다면, 죽은 척하거나 되돌아갔을 텐데, 이길 수 없는 야생동물을 이겨먹겠다고 싸우면, 상처 투성이가 되거나 죽는다. 등 뒤에서 덮쳐온 그것에게 난도질당한다. 으악으악. 으갸갸.
그래서 웬만해선 약을 끊어선 안 돼.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알고 있지만, 약을 끊었다. 절대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그저 약을 끊고 싶었고, 올해 3월을 마지막으로 병원을 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일단, 지금은 괜찮다. 그게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약을 끊었을 뿐이다.
다행히 사건(발작)은 일어나지 않고 있고, 지금으로선 괜찮을 것 같다. 약의 역할을 해주는 대체재가 생겼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생의 롤모델로 생각하면서, 늘 해야지 한 것이 있다. 바로 달리기다. 그래서 시도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많이 달리려고 하니까, 힘들었고, 힘드니까, 또 금방 지쳐서 안 하게 되었다.
이번에 약을 끊으면서 달리기로 하면서부터는 방법을 바꿨다. 한 번에 잘하려고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한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자. 1분을 달려도 달리는 거니까. 처음엔 그만큼이라도 해보자.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옆에 있는 학교 후문이었다. 10미터나 될까? 거기까지만이라도, 달리는 시늉을 했다. 당연히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1분도 걸리지 않는 일이니까. 그다음엔 조금 더 멀리 있는 편의점을 찍었고, 그다음엔 한강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신호등, 그다음엔 한강 변으로 갈 수 있는 굴다리까지. 그리고 비로소 한강 보행 도로에 들어섰고, 그다음엔 1킬로 미터, 그다음엔 3킬로 미터, 조금씩 거리를 늘렸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한텐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였다. 달릴 땐, 불안하지 않았으니까. 달리는 날엔 덜 불안했으니까. 달리면서 생각했다. 달리는 게 약이다. 달리는 게 약이다. 약대신 먹는다고 생각했다.
달리는 시늉을 했다. 100키로에 가까운 몸으로 뒤뚱거리며 달리는 중년의 남자. 하루키의 날렵하고 단단한 달리기와도 다르고, 한강에서 달리는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나처럼 느리게 뛰는 사람은 없었다. 파워 워킹으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제치며 걸어가는 아줌마들. 그들이 앞뒤로 팔을 흔들며 걸어가면, 그들이 나보다 더 빨랐다. 파워워커들에게는 지고 싶지 않았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이 처음에는 신경 쓰였다. 낙오자 같아서. 패배자 같아서. 느리고, 뚱뚱한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이럴 것 같고, 저럴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팠다.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생각하는 대신 그저 달렸다. 호흡에 집중하고, 달리는 나에 집중했다. 근육의 감각을 느끼고, 콧구멍으로 드나드는 간지러움에 집중했다. 등 뒤로 타고 내리는 땀의 감각에 집중했다.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그저 달리니까, 딴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게 좋았다.
생각해 보니 진짜 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의 효과가 그거다. 생각을 줄여주는 것. 덜 예민하게 만들어서, 생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달리기는 몸에 집중하고, 덜 불안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자주 꾸준히 달렸다. 한창 달릴 때는 이틀에 한 번은 꼬박꼬박 달렸다.
달리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직까지 큰 사고가 없다. 달리기가 약을 대신한다, 그런 결론을 내려도 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주문을 외우듯이 달릴 때마다 되뇐다. 이것은 약을 먹는 것이다. 약을 먹으면 다 괜찮다. 그 마음으로 달렸고, 달리고 있다.
그렇게 달린 끝에, 2주 전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다. 생애 첫 하프 마라톤 완주.
1분도 달리지 못했던 내가 하프 마라톤을 달렸다. 21 키로에 가까운 거리를 100키로에 가까운 몸을 이끌고 달렸다.
물론 기록은 2시간 33분. 뒤에서 교통 통제를 하던 경찰들이 시간이 다 되어서 해제를 할 정도로 끝에서 달렸지만, 어쨌든 끝까지 달렸다. 포기하고 엠뷸런스에 타지 않았다. 두 다리로 기어코 결승선을 끊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마라톤도 아니어서, 혼자 왔다. 다른 사람들처럼 크루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혼자 달렸다. 완주한 순간 같이 기쁨을 나눌 사람은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누구보다 내가 기뻤다. 나 자신이 나 자신과 함께 기뻐해줬다. 약을 먹는 대신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다고? 내가? 장하다. 대단하다. 훌륭하다. 삶을 망가뜨리는 대신, 스스로 살려고 애쓴 것 같아서, 누구보다 내가 나와 나를 기뻐했다.
축제와 그때의 환희, 흥과 열은 금세 지나갔다. 기뻤지만, 늘 그렇게 기쁠 수는 없으니까. 러닝화도 고생했는지, 완전히 망가졌다. 밑창에 구멍이 뚫렸다.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바깥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아내가 고생했다며, 새 러닝화를 사주었다.
새 러닝화가 생겼으니까, 어쩔 수 없네. 샀으니까 어째, 또 달려야지.
운동화 끈을 매고 해어 밴드를 머리에 차고, 런데이 앱을 실행한다.
오늘도 딱 5킬로만.
약 대신 달리기를 먹는다.
불안 대신 호흡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