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왔다. 목욕이 최고다!
씻고 씻고 또 씻다 보면, 마음속 묵은 때까지 씻겨나갈 거야.
날이 추워진다. 길었다, 여름이. 끈질기게 10월까지 따라붙던 여름이 가셨다. 순식간에 단풍이 진다. 잎이 떨어진다. 며칠 전 유난히 추운 새벽 출근길에 하아 하고, 크게 숨을 뱉었더니, 하얀 입김이 나왔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가겨울인지, 겨가울인지, 어쨌든 열기가 가시고, 한기가 서린다.
불안한 사람은 계절 변화에 민감하다. 아니, 계절 변화뿐이겠는가. 뭐가 됐든, 변화에 민감하다. 작은 변화에도 크게 놀란다. 괜한 상상을 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놀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맘때쯤 되면, 꽤 우울해진다. 좀 더 긍정적인 삶을 살자고, 애써 보지만, 여름까지는 어찌어찌 버텨본다지만, 날이 쌀쌀해지면 어쩔 수 없다. 몸이 움츠러들면, 마음도 움츠러든다.
추위가 찾아왔다. 겨울이 왔다. 겨울은 싸워야 하는 계절이 아니다. 여름은 신나게 뒹굴고, 싸우기도 하고, 뽀뽀도 하고, 활발하게 살아갈 수 있다. 힘이 있다. 마음껏 땀을 흘려도, 죽지 않는다.
그러나 추위는 다르다. 겨울은 오히려 기다리고, 버텨야 한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면서, 내면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집중해야 한다. 자칫하면 살아갈 힘을 꺼뜨릴 수 있다. 그러니까 방심은 금물. 겨울이란 거인이 다 지나갈 때까지 버텨야 한다.
추우면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도 힘들다. 이불을 걷어찰 힘도 없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눈을 감고, 자고 또 자고 싶다. 아무도 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도 날 깨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조금 힘이 돌아와 하하하, 하다가도, 작은 말 한마디에도, 예상치 못한 작은 일에도 힘을 잃는다. 주저앉고 싶다.
눕고 싶다. 누워 있다가, 물을 마시고 싶으면, 냉장고까지 기어간다. 아주 천천히. 하루 종일. 한나절이 걸린다. 냉장고까지 가는 것도 한나절인데, 밖으로 나가는 건 큰 도전이다. 봄이 올 때까지 방 안에 틀어박히고 싶다. 이불속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갔으면 좋겠다.
분명히 그런 거다. 곰이 겨울잠을 자는 것도, 우울하니까, 불안하니까, 곰인데, 새우처럼 웅크리고, 우웅, 우웅, 나 우웅해. 이러면서 굴에 처박혀 있는 게 분명하다. 안 봐도 비디오다.
나만 이런 게 아니다. 겨울이 되면, 정신 병자는 더 정신 병자가 된다. 우울한 사람은 더 우울해진다. 불안한 사람은 더 불안해진다. 모든 생명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겨울은 위험한 것이니까, 생을 위협하는 것이니까. 다들 조심스러운 것이다. 살아가기 조심스러운 계절인 것이다.
이럴 때, 죽고 싶지 않아서, 불안하고 싶지 않아서, 우울하고 싶지 않아서, 감정을 바꾸기 위해서,
기분 전환이 되는 일을 한다.
따뜻한 물에 목욕하기.
물이 싫다. 몸에 닿는 게 너어어어어무 싫다. 씻으려면 몸을 움직이여하고, 힘을 써야 하는데,
무거운 몸뚱이를 움직인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보통은 대충 씻는다. 대충이라도 씻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싫지만,
하는 짓이다.
그런데 씻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속 묵은 때가 하도 무겁게 쌓여서 떼어버리고 싶을 때,
특히 이렇게 날도 춥고, 마음도 추워질 때면, 따뜻한 라면 국물이 생각나는 것처럼,
온몸을 데워줄 온수가 간절하다.
그저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혈관 속 곳곳 얼음 가시들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다.
비로소 뜨거운 피가 제 속도로 흐르는 것 같다.
죽을 것 같을 때, 목욕을 하면, 조금 살 것 같다.
불안할 땐, 목욕을 한다.
씻는 게 정말 싫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그저 있는 건 나쁘지 않다.
오늘도 하루종일 우울하고, 불안하고, 피곤하고, 하여튼 간에 그냥 싹 다 싫어져서,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부어놓고, 한 시간 넘게 몸을 담갔다.
쭈글쭈글 지문이 사라졌다. 좋다.
익명의 인간이 되는 것 같아서.
쭈글쭈글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을 정신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조금은 더 살만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