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했던 한인 빵집은 한인 마트 안에 있는데 따로 문과 벽으로 구별되어 있지는 않았다. 마트에서 장 보기가 끝난 손님들은 빵집 매장으로 바로 들어와 케이크와 빵들을 사 가기 쉽도록 되어있었다.
May I help you, sir?
내가 인사를 건네자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는 인도 사람이었다. 그는 엉뚱하게, " I am looking for a Korean cook."이라고 했다. 빵도 아니고 케이크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면 베이커여야지. 한국 음식 조리사를 찾고 있다는 말은 대체 뭔가 싶었다.
매장 안에 진열된 빵과 케이크가 안 보이나 싶었지만 나는 정중히 한인 마트 안에 있는 건너편 푸드코트를 가리키며 한국 식당이 있으니 거기로 가보라고 안내해 주었다. 그는 고맙다며 자리를 떴다. 나는 뜨악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여기는 빵집인데... 한국 조리사라... 흠, 인도 사람들 엉뚱하네... 내가 이리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그가 어느 사이 다시 빵집 매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게 보였다.
뭐지?
그는, 나는 수석 셰프 AJ라고 한다며 자기를 소개했다. 회사에서 같이 일할 한국 조리사를 찾는다고 했다.
'식당'이 아니고 '회사?'
그는 한국 음식을 할 수 있는 한국 사람을 꼭 찾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 모두 주방에서는 멕시코 사람들이 일했다. 인건비를 감안하자면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래서 굳이 한국 사람을 찾는 그가 특별해 보이긴 했다. 나는 그의 간곡한 얼굴을 읽은 후에야 친절하게 회사의 근무 조건과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내가 사람을 찾으면 연락해 주겠다고 말하자, 그는 엉뚱하게 내가 한국 음식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순간, 그는 내가 한국 사람인지 모를 수 있겠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 이게 질문인가 싶은 얼굴로, 나는 한국 사람이고,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가 남기고 간 메모는 이러했다.
근무조건 :시간 - 오전 6 - 오후 2시
요일 - 월 - 금 (토, 일 휴무)
혜택 1. 휴가& 국경일 휴무 시 급여 지급
2. 의료보험(치과, 안과 포함) 등등
자격 - 한식 조리사(경험자)
그는 나에게 회사가 좋다는 말을 강조했다. 식당에서 일해본 적 없으니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남편에게 오늘 일을 전했다.
조건이 아주 좋은 거 아닌가? 네가 해보면 안 돼?
자기야, 우리 가족 5명 먹는 일도 쉽지 않은데, 더군다나 많은 인원을 서빙하는 일은 집에서 음식 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텐데 무슨 소리야?
나는 이틀 동안 내 주변에 생각나는 분들을 떠올렸다. 정말 조건이 너무 아까웠다. 한국 분들이 정보가 없어서 이런 회사가 있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빵집에서 틈틈이 문자와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쉬이 사람을 찾기에는 시간이 짧았고 솔직히 내가 열심히 찾을 이유도 없었다. 나는 아쉬워하며 인도 셰프에게 정중히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보내주는 일은 예의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네가 찾는 사람이 없다. 나는 2년 동안 빵집에서 캐시어로 일해오고 있다. 나는 네가 찾는 자리에 해당 사항이 없다. 만나서 너무 반가웠다.
나는 힘없이 문자를 보낸 후 빵집에서 나의 위치를 돌아보았다. 나의 근무조건과 비교가 되었다. 정규직/비정규직이라더니.
내가 미국을 오기 전 나는 이런 구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운 좋게 졸업 전에 이미 취업을 했던 탓도 있었다. 직장 내에서는 여자 사원의 복지와 대우가 남자 사원들과 차이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드물었다고 들었다. 여직원들이 더 많았고, 회사는 성장 가운데 있었다. 나 역시 야근을 많이 했다. 위 선보다 빠른 퇴근은 언제나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나만 용기를 내면 충분히 가능했다. 여직원들만 쓸 수 있는 월차도 있어서 나는 여직원들끼리 금요일 저녁에 밤기차를 타고 지리산으로, 소백산으로 산행을 떠날 수 있었다. 회사는 서울역 뒤편 공덕동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어서 일을 서둘러 끝내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서울역을 걸어서 갔었다.
나는 정규직, 비정규직과도 한참 동떨어진 빵집 <알바> 자리를 그동안 감사하며 다녔다. 미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자괴감보다는 늦었지만 이 자리를 통해서 나는 손님을 응대하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을 배웠고, 그 일도 내가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인 마트 안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사고파는 일상의 분주함은 저잣거리에 놀러 나온 듯 활기차서 나도 신나게 일할 수 있었다. 주문 케이크의 데코레이션을 해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제법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웨딩 케이크의 화룡점정과 같은 레터링도 내가 했다. 나는 케이크 만드는 일과 케이크를 주문받고 파는 일이 재미있었다. 물론 나의 일당에 변화는 없었다. 여사장님의 배려는 있었지만.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곧 깨달았다.
한국 빵집으로서 상대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협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의 각 개인은 어떤지 몰라도 한인 사회의 위치는 미국에서 그리 높은 게 아니었다. 이 말은 경제적 입지와 경제적 역할이 너무나 작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빵집은 백인을 대표하는 주류를 상대로 장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내노라는 프랜차이즈 빵집이었지만 미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대형 마트 안에는 모두 자체 베이커리가 들어가 있었고 가격은 매우 저렴했다. 나는 너무 달고 느끼해서 먹지 못했지만 나는 외국인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베이커리를 제치고 역으로 아시안이 운영하는 빵집에 미국 사람들이 관심을 둔다는 것은 시장 논리로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님을 곧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내 빵집을 운영한다 해도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빵집의 수익은 빵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케이크에서 수익을 내야 하는데 미국의 케이크 시장은 매우 컸고 특히 웨딩 케이크 시장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케이크를 잘 만드는 기술만으로 그 시장에 들어갈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었다. 결혼이라는 큰 시장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지 않은가. 결혼은 가장 미국적인, 가장 한국적인 것을 반영하고 있는 시장이다. 결국 인적 네트워크가 성공의 기반인 셈인데 그 인적 네트워크에 한국 사람이, 한국 문화가 연결되기에는 너무가 높은 벽이라는 걸 나는 곧 알았다. 문화의 벽은 내가 그 문화를 좀 안다고 낮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화는 강력한 지배 세력의 힘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현재 가장 부유하고 힘이 세다는 최강국 미국이었다.
달라스는 텍사스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며, 미국에서는 아홉 번째로 큰 도시다. 아시안들은 대개 큰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큰 도시에는 나름대로 각 나라의 커뮤니티가 크게 자리 잡아 중심 역할을 해오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나는 캘리포니아 북쪽 샌프란시스코에서 1시간 거리 남쪽에 살아었다. 한인 타운으로 유명한 L.A. 는 5시간 떨어져 있었다. 이 거리는 미국 안에서는 굉장히 가까운 근거리에 속했지만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다만 영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한인 사회가 매우 크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L.A. 디즈니랜드에 갔을 때도 들리지 않았다.
달라스는 미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는데 아시안 커뮤니티의 힘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것을 알았다. 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인 커뮤니티도 작았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중국 말 안내문이 도서관에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텍사스로 이사를 온 후 나는 그 차이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말은 나에게는 백인들의 고압적인 태도와 자세가 일상에서 드러났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사 오기 전까지 내가 까만 머리 아시안이라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않고 살았다. 아이들 학교 참관 수업 시 교실 뒤에 앉아있으면 금발 머리의 아이들은 까만 머리의 아이들 틈에서 듬성듬성 보였다.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애플 본사 뒤편에서 살았던 나는 텍사스로 이사 오고서야 몸으로 비로소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분명함을 느꼈다. 인식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이사 온 후 캘리포니아에서 인기가 있던 햄버거 가게가 동네 근처에 오픈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과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었다. 먹는 동안 나는 주변을 여러 번 살폈다. 그전에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한국 사람은 고사하고, 내가 보아왔던 그 많은 중국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내 눈에는 띄지 않았다. 나와 아이들의 머리 색깔이 유난히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의 지역적 차이는 나에게는 별개 국가의 차이처럼 느껴졌다.
빵집은 거대한 시장으로 들어갈 수 없는 틈새의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중국 사람, 한국 사람, 베트남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었다. 이런 심란함으로 마음이 싱숭생숭해 있을 때 회신 문자가 도착했다. 인도 셰프였다.
미스 조앤, 당신의 고객 서비스는 최고였습니다. 당신이 김밥, 김치와 약간의 한국 반찬을 만들 줄 안다면, 나는 당신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Whaaaat!!!!!
아래의 주소로 내일 2시까지 꼭 와주세요.
Oh, My goooood...
뭐지?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