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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차언니 Aug 14. 2020

장르 파괴! 반백수 패밀리 생활기

세 식구가 24시간 동안(150일이나) 딱 붙어 지낸다고?

- 반백수 1호_육아휴직 아빠
- 반백수 2호_전업주부 엄마
- 반백수 3호_만 1세 아기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 대체 뭘 해?


육아휴직이 시작되기 전 1호가 가장 궁금해했던 부분이며, 막상 육아휴직에 돌입하고 난 뒤에는 주변 사람들이 무수히 입에 담았던 바로 그 질문. 이 물음 속에는 온 가족이 24시간을 150일이나 함께 보내는 것이 가능한 지에 대한 의구심이 가득 담겨있다.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 삶 속의 어느 구석을 살펴보아도 가장이 외출 한 번 없이 가족들과 몇 날 며칠 부대끼며 지내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백수 패밀리의 일상은 아주 진부하다. 색다른 대답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모든 일정에 1호가 함께 한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 '대체 뭘 하냐?'는 질문에 맞설 참신한 답변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질문 한 이들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결론을 내놓은 채 질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 질문을 조금만 바꾸어 본다면?


하루 종일 같이 있으니 뭐가 달라졌어?


신속한 대답을 위해 달라진 것을 손에 꼽아보려니, 손가락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냥 말해본다. 반백수 패밀리의 결성으로, 한 가족 인생의 장르가 와장창 파괴(?)되었다고.


한동안 반백수 부부는 각각 슬픈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었다. 한 사람은 출근과 늦은 퇴근을 무한 루프로 반복하는 '체험 야근의 현장'의 히어로, 나머지 한 사람은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고군분투하는 '극한 육아'의 헤로인이었달까. 하지만 1호와 2호, 3호가 똘똘 뭉쳐 함께 하는 나날들이, 익숙한 흐름을 뒤흔들어 놓았다. 다큐멘터리는 어느새 코미디가 되고, 호러가 되었다가 어드벤처를 거쳐 판타지에 머물기도 했다. 가문 밭에 단비 내리듯 로맨스가 찾아오는 날도 생겼다. 한마디로 반백수 패밀리는 '행복하며 무섭고 놀라우면서도 기쁜 시시콜콜한 이야기'의 주인공 TOP.3가 되었다.




오묘한 장르로 물든 그들의 실질적인 일상은 대강 이러했다.


06:30 am - 첩보 액션

1호가 출근하던 당시 맞춰두었던 알람이 울린다. 2호의 휴대전화도 예외는 아니다. 둘은 민첩하게 알람을 끈 후 서로에게 눈빛으로 사인을 건넨다. 3호의 쪽쪽이 빠는 소리가 조금 다급해지긴 했지만, 2호는 내공이 깃든 토닥임으로 다시 그녀의 깊은 잠을 유도한다. 그 사이 1호는 창문가로 침투해 커튼을 여밈으로써 새어 들어오는 빛과 소음을 원천 차단한다. 상호 간에 OK 사인이 오가고, 둘은 아직 더 잘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음을 만끽하며 조금 더 잠을 청한다.(아마도 이 만족감 때문에 육아휴직이 끝나는 시점까지 알람을 그대로 둔 것이 아닐까.)


08:00 am - 어드벤처

3호가 까르르 웃는 소리에 잠에서 깬 1호. 예민한 탓에 1호가 출근하던 때에는 잠투정을 하며 눈물을 보이기 일쑤였던 3호지만, 이제는 눈을 뜨자마자 웃는 것이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자신의 몸에 오르기 위해 애쓰는 3호를 기꺼이 안아 배 위에 올려놓은 1호는 곧바로 바나나 보트로 변신한다. 바나나 보트의 목적지는 푸르른 대양 너머에 위치한 '꽘'이라는 섬. 둘은 긴장하며 나아간다. 거친 파도와 성가신 해적들, 무시무시한 상어 등의 장애물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험난한 여정을 뒤로하고 도착한 목적지! 그런데 그 이름이 왜 '꽘'이었냐고? 글쎄. 그건 며느리도 모른다.


09:00 am - 무협

2호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1호는 3호의 기저귀를 갈고, 손과 얼굴을 씻긴다. 목욕재계를 마친 3호는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진정한 무사는 자신의 몸을 정갈하게 하는 행위만으로 천하를 호령할 방도를 익히 아는 법. 이미 승자가 정해진 강호의 한 복판에 1호가 겁도 없이 뛰어든다. 기세 등등한 1호의 손에 이유식 숟가락이 무기가 되어 들렸다. 하지만 첫술부터 입을 굳게 다물어버리는 3호의 무공이 만만치 않다. 심지어는 1호의 무기를 호시탐탐 넘보는 상황. 재빠르게 판의 흐름을 읽은 1호는, 기꺼이 자신의 무기를 내어주는 대신 2호를 통해 두 번째 무기를 공수받는 새로운 전략을 세운다. 3호가 자신의 무공을 믿고 방심하는 순간을 틈 타 살포시 벌어진 그녀의 입을 노려보았으나, 아뿔싸. 애석하게도 입은 손보다 빨랐고, 굳게 닫힌 입 앞에는 1호의 좌절만이 남았다. 곧이어 그에게 남았던 마지막 무기마저 회수한 3호는, 전리품으로 획득한 쌍숟가락을 맹렬히 휘두르며 즐거워했다.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 패자의 어깨를 토닥이는 2호. 1호는 2호의 능수능란한 공략법을 지근거리에서 분석하며 후일을 도모한다. 언젠가 반드시 3호를 꺾고 강호를 제패할 수 있기를.


나날이 발전하는 쌍숟가락 신공


11:00 am - 미스터리

동네 아이들이 모두 어린이집으로 사라진 시간. 애매하게 춥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기묘한 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무리의 생명체들이 텅 빈 놀이터를 접수한다. 곳곳에는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낙화와 낙엽들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3호로 추정되는 생명체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낱낱이 바스러뜨린다. 범상치 않은 그녀가 곧이어 노린 것은 곳곳에 세워져 있는 철로 만든 봉. 기둥을 하나하나 불규칙한 순서대로 만져가며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중얼거린다. 곁에 선 나머지 두 생명체는 이리로 저리로 흐느적거리며 3호의 흔적을 뒤쫓는다. 어쩐지 선택받지 못한 놀이터의 놀이기구들이 끼익 끼익 기괴한 소리를 내며 슬퍼한다.


03:00 pm - 생활 밀착형 휴먼 드라마

2호에게 1호의 육아휴직은 아주 좋은 기회다.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대낮에 마트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1호의 퇴근길에 만나서 함께 마트에 들르곤 했지만, 동네 마트에서 밤에 하는 쇼핑과 낮에 하는 쇼핑은 질적으로 다르다. 대형마트처럼 넉넉하게 물건을 조달해 놓지 않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는 원하는 이유식 재료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재료가 남아 있더라도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터넷 쇼핑으로 모든 재료를 구비하자면 소량 구매가 어려울뿐더러 물건 상태가 가늠되지 않아 난감하기 그지없다. 낮의 동네 마트는 종종 할인폭이 큰 타임세일을 하기도 하고, 그날그날 다른 제품을 저렴하게 팔기 때문에 득템을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2호의 폭풍 쇼핑이 진행되는 동안 1호는 유모차를 끌고 청과, 수산, 정육 코너 등을 돌며 3호에게 진열된 상품들의 이름을 알려준다. 정육코너 앞에서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는 것을 보니, 앞으로 세일 때마다 이 곳에 줄을 서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쇼핑을 마친 2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하고, 반백수 패밀리는 대낮의 마트 방문으로 소소한 행복을 얻었다.


04:00 pm - 범죄 코미디

2호의 운동 시간. 그녀가 외출하고 난 뒤의 집에는 1호와 3호만이 남는다. 한 시간을 진심으로 알차게 보내보자는 확고한 의지를 다지며 리모컨을 한 편으로 치운다. 1호는 3호가 직접 골라오는 책을 읽어주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몇 권 가져오다 그만두고 만다. 자동차와 악기들로 3호의 시선을 끌어보지만 이 마저도 역부족이다. '국민 문짝'이라고 불리는 장난감 앞에서 벨을 계속 눌러보았지만 문도 열어주지 않는다. "택배 왔어요~"라는 소리가 들리면 우편함을 열어 주는 것이 전부. 이쯤 되면 2호 몰래 비장의 카드를 꺼내는 수밖에. 냉장고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를 듣더니 3호가 쪼르르 달려가 아기 소파에 앉는다. 평소 간식을 먹는 장소다. 1호는 3호의 옆에 나란히 앉아 냉장고에서 꺼내 온 아기 치즈를 사이좋게 나눠먹는다. 2호가 있었다면 곧 저녁시간이 된다며 허락해주지 않았을 간식이다. 그러니 그녀의 눈을 피해 스릴 있게 치즈를 먹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행복하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치즈를 다 먹은 3호가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이 외치는 금단의 주문!
"기가지O, 핑크O 채널 틀어줘!"
2호가 귀가했을 때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책을 보며 깔깔 웃는다. 그렇다. 이것은 웃음이 절로 나오는 완전 범죄다.


08:00 pm - 인권 드라마

3호의 눈꺼풀이 무거워 보인다. 느릿느릿 떴다 감았다 하는 눈을 비비고 또 비벼가면서도 한참은 더 놀고 싶은 그녀. 이때다 싶은 1호가 3호를 폭 안아 들었다. 오늘만큼은 일찍 육퇴를 선언하고 싶기에, 자신의 몸에 기대어 있는 그녀의 등을 간절한 마음으로 토닥인다. 자장가 컬렉션까지 BGM으로 보태자 금세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든다. 3호를 방에 눕히고 나와 시계를 보니 9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육아휴직 전에는 늦은 생활 패턴 때문에 11시가 넘어서야 잠들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3호의 이른 취침이 1호와 2호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아준 셈이다.


09:00 pm - 로맨스

1호와 2호가 나란히 앉아 찻잔을 기울인다. 오늘 고른 차는 직접 덖은 목련꽃차. 찻주전자에 피어나는 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함께 보낸 일상을 음미한다. 이 사람과 결혼해서 참 다행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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