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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Oct 26. 2022

첫 감기

“엄마는 원래 그래. 그러면서 엄마가 되는 거야.”



“엇, 좀 뜨겁나?”

“엉? 좀 뜨거워?”


평소와 달랐다. 볼이 발그레하고 이마가 뜨끈했다. 남편은 어, 음, 에? 하다가 출근해버렸다.

보통 때보다 웃지를 않았다. 열을 재보자. 

떨리는 가슴으로 체온계를 꽉 부여잡고 아기의 조그마한 귓구멍에 살포시 넣어 버튼을 눌렀다.

삐익- 아기 눈이 동그래졌다.

창이 빨간색으로 변했다. 빨간색은 불길하다. 잘 못 쟀나.

다시 한번, 반대편 귓구멍에 기계를 쏙 넣고 버튼을 눌렀다.

삐익- 아기가 도리질을 쳤다.

빨간색.

39.0도.

인간의 체온이 몇 도가 정상이더라? 아무튼 39도는 아니다.

무심코 발을 만져봤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차가운 것도 불길하다. 손은 발보다 덜했지만 따뜻하지도 않았다.

나는 허둥댔다. 다음엔 뭘 해야 할지 순서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이미 사고 회로가 뒤엉켜 버렸다.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왜 울어? 아파? 아픈 거야? 더운 거야? 추워? 배고파? 아플수록 잘 먹어야 한다니까 일단 먹여보자.

우는 아이를 홀로 눕혀 놓고 분유를 타러 갔다. 마음이 급해졌다.

분유 가루가 테이블에 후드득 떨어졌다. 아침부터 줄곧, 얘가 왜 이러지? 뭐지? 무슨 일이지? 하는 통에 물을 미리 데워놓아야 한다는 걸 잊고 말았다. 서둘러 포트의 버튼을 눌렀다.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다 급기야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기에게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다람쥐 굴 만한 집이 운동장 같이 느껴졌다. 얼굴이 거의 자줏빛으로 변한 채 두 눈을 질끈 감고 사지를 뻗대며 최선을 다해 울고 있는 아기를 향해,

“응, 응, 배고프지?(배고파서 우는 거라고 말해줘!) 엄마가 얼른 쭈쭈 줄게! 미안, 미안. 기다려 잠깐만!”  

아기의 울음소리에 질세라 큰 소리로 달랬다. 그때 입을 왁 벌리고 우는 아기의 목젖이 눈에 들어왔다. 달달 떨리는 목젖 주변부에서 촘촘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는 실핏줄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보통일이! 병원에 가야 할 테니 우선 먹여야겠다 마음먹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이럴 수가.

물이 너무 뜨거웠다.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일단 그대로 뜨거운 물을 부어 분유를 타고, 개수대에서 식히기로 했다. 찬 물에 대고 있는데도 젖병이 뜨거웠다. 그동안 아기의 울음소리는 절정에 달했다. 

울다가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울음소리에 내가 죽을 것만 같았다. 

얄궂은 젖병이 쉽사리 식지 않았다. 차가운 물에 젖병을 담가 두고 다시 아기에게 달려갔다. 아기띠로 아기를 안았다. 품에 안자 울음소리의 데시벨이 살짝 내려갔지만 여전히 대단한 기백으로 울어댔다. 무릎을 연신 굴신하며 한 손으론 아기의 등을 토닥이고, 한 손으론 다시 찬물을 틀어서 분유를 식혔다. 얼마 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아기를 품에 안아 젖병을 물렸다. 울 때와 같은 굉장한 패기로 젖병을 빨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빨았을까. 순식간에 아기 얼굴이 벌게지더니 표정이 일그러졌다. 곧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설마.

젖병의 꼭지가 내 손등을 향하도록 거꾸로 든 뒤 몇 방울 떨어뜨렸다.

뜨끔!

벌침에 쏘인 듯 화끈한 감각이 손등을 찔렀다.

스스로 내 등짝을 때려주고 싶었다. 딱! 소리가 나도록 멍청한 이마에 딱밤을 때려주고 싶었다.

아기를 다시 안고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나도 울음이 팍 터져 나왔다.


엉엉, 난 구제불능이야. 지민아, 으흑, 엄마는 자격이 없어. 난 역시 안돼. 엉엉 안돼. 어떡해, 울애기. 헝엉.


여리고 여린 목젖이, 목구멍이 얼매나 뜨거웠을꼬.

어서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월의 혹독한 추위에 걸어서 갈만한 병원이 이 동네엔 없다. 

망할 동네. 동화 속 같이 예쁘고 아담하다던 동네는 이제 망할 동네가 됐다.


젖병을 다시 찬물에 담그고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엄마, 지민이가 열이 나. 아침부터 좀 이상했는데, 열 재봤더니 39도야. 병원에 가야겠어. 지금 와줄 수 있어?”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아플 때도 됐지이. 괜찮아.”


분노가 솟구쳤다. 성난 강아지가 짖듯 엄마에게 뭐라고 짖어댔다. 뭐라고 짖어댔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이구! 알았어! 갈게.”

엄마가 어처구니없어했던 것 같다.


“오구, 아파쪄 울애기? 아야 해? 괜찮아. 병원 갔다가 할미 집 가자.”

아기는 할머니와 눈을 맞추고 할머니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는 듯했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다가 칭얼거림으로 바뀌었다. 아기의 폭풍 같은 울음이 사그라들자 나도 정신이 돌아왔다.

난생처음 겪는 몸살 기운으로 육신이 괴로운 와중에 엄마라는 작자가 혼이 빠져서 허둥대는 걸 아기는 온몸의 감각으로 느꼈을 것이다. 급기야 혓바닥과 목구멍이 홀라당 데이는 끔찍한 꼴을 겪었으니, 자기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던 중 할머니의 여유 있는 목소리와 표정을 보면서 안심했을 것이다.

아기의 첫 감기로 나는 패닉에 빠졌었다.


친정 근처의 소아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아기가 나을 때까지 친정에 있을 계획으로 기저귀와 분유 등 한 보따리의 짐을 가지고 왔다. 난 이제 혼자가 아니야. 완전하게 안심했다.

다행히 목구멍엔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휴. 머릿속에 아기 목구멍의 붉은 그물망이 자꾸 아른거렸다. 꿈에도 나올 것 같다. 거기에 뜨거운 분유를 부은 거야, 내가. 나란 인간은 왜 이 모양일까. 


딸기 시럽 색깔의 물약조차도 아기는 기세 좋게 빨아먹었다. 엄마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보살핌 안에서 오랫동안 푹 잠을 잤다. 이제야 비로소 안전해졌다고 아기도 느끼는 것 같았다. 늦은 저녁 시간엔 하루 종일 나오지 않던 쉬가 나왔다. 고열에 시달릴 땐 소변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됐다! 쉬 했으니까 이제 거의 나은 거야. 손발도 아까보단 덜 차네. 내일이면 말짱해지겠다. 너도 그랬어. 하루면 낫더라고. 그치이? 울애기 얼른 나을 거지?”


엄마 뒤에서 후광이 비춰보였다.


“해열제 약기운 떨어지면 밤에 자다가 열이 다시 오를 수도 있어. 그러면 밤 꼴딱 샌다. 아기 잘 때 너도 자둬.”


그 말은 틀림없었다.

새벽 네 시경, 낑- 하는 소리가 났다. 눈이 번쩍 떠졌다. 손등으로 아기의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였다. 체온을 쟀다. 39.5도.

아기는 태어난 이래 가장 오랜 시간 굶어서 기운도 없는지 평소처럼 큰 소리로 울지도 못했다. 

해열제를 먹이고 서늘한 거실로 안고 나갔다. 약국에서 사 온 쿨 패치를 사용해보기로 했다. 파스 같이 생긴 네모난 패치는 말 그대로 쿨해서 원하는 부위에 붙이면 열을 내려주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세상이 좋아졌구나. 좋아진 건가? 나 어렸을 적엔 엄마가 깨끗한 수건에 찬 물을 적셔서 몇 번이고 고쳐 접으며 시원한 부분이 이마에 닿도록 놓아줬었는데. 정신이 혼미하고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엄마의 그런 손길이 느껴지면 사랑받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자고로 열날 땐 누군가 올려주는 젖은 수건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세상이 너무 각박해지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패치를 꺼내 끙끙대는 아기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올려놨다.

그 쿨한 것이 이마에 살짝 닿자마자, 눈을 감고 졸면서 끙끙대던 아기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지더니 왕!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기는 기겁했다. 나도 기겁하고, 고요히 잠들었던 거실이 함께 기겁했다.

“열 나?”

엄마가 부스스하게 안방에서 나왔다. 전선에서 불침번 서는 병사를 돕듯, 나와 아기가 있는 곳으로 와 앉았다. 아기의 차가운 발을 주물러 줬다.


“더 단단해지려고 아픈 거야. 애들이 이렇게 한 번 씩 아프고 나면 부쩍 자라서 안 하던 것도 하더라고.”


쿨 패치에 적응한 아기가 조용히 잠들었다.

할머니가 된 엄마와 엄마의 딸, 그 딸의 딸이 한 덩어리로 새벽을 맞이했다.


“친구들이 자기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나는 “괜찮아, 괜찮아. 크느라 아픈 거래.”라고 너무 쉽게 말했어. 그걸 위로랍시고. 근데, 아까 엄마가 오기 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라. 내 새끼가 괴로워서 울고 있는 걸 보는데 가슴이 막 무너져서 같이 울었어. 당황해서 허둥지둥,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분유 하나 제대로 못 타서 애 목구멍 다 델 뻔하고, 큭큭. 겪어보지도 않고 너무 쉽게 떠들었어. 사실, 이건 참 사소한 일이고, 앞으로 애가 자라면서 난관들이 참 많을 텐데…….”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원래 그래. 그러면서 엄마가 되는 거야.


크고 작은 일들로 몇 번이나 더 무너져야 강한 엄마가 되는 걸까? 

점차 아기의 손과 발에 온기가 느껴졌다.




150205 생후7개월


친정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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