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내가 네 엄마야!
낯가림이 시작됐다. 기쁘다. 이제야 비로소 나를 엄마로 인정해준 것 같다.
이모와 함께 할머니 댁에 방문했다. 3주 만이었다. 그곳이 낯선 장소임을 직감한 아기의 표정이 곧바로 굳어졌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실룩였다. 하얀색 눈깔사탕 같은 양손으로 내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잔뜩 경계하는데, 할머니가 어르는 순간, 곧 터져버렸다.
절규하듯 내지르는 그 울음은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단숨에 집어삼키고, 논리적 이성을 마비시켰다. 결국 잠깐의 낮잠 시간을 빼곤 쉼 없이 울다 왔다.
아기는 제 집으로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깍깍대고 파닥거리며 놀기 시작했다. 기특한 것. 그렇지. 여기가 우리 집이지. 너는 내 아기이고, 나는 네 엄마지.
*
같은 극단에서 연극을 했던 단원 세 명(모두 미혼 / 남자 2, 여자 1)이 우리 집에 방문하기로 했다. 이 날을 어찌나 기다렸는지, 아침부터 기운이 뻗쳐서 아기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맹렬하게 청소를 했다. 평소보다 분주한 엄마의 몸놀림을 따라 등 뒤 아기의 시선도 바삐 움직였다.
오늘은 엄마랑 친한 이모, 삼촌들이 올 거야.
지민이 예뻐해 줄 거야. 인사 잘하고. 알았지?
주절주절, 등 뒤의 아기에게 당부하면서 걸레질을 했다. 실로 오랜만에 사회생활할 때의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생기가 솟아올랐다. 그 간의 소식을 업데이트하고, 나의 육아 고충을 토해내리라.
초인종이 울렸다. 신나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기를 안고 문을 열어줬다. 성인 세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이 신발을 채 다 벗기도 전에,
현관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아기는 맹렬하게 짖어, 아니, 울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눈이 일제히 동그랗게 커졌다. 복도까지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에 얼른 현관문부터 닫았다. 셋은 거실로 들어서도 되는 건지 엉거주춤 서서 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쉽게 가라앉을 기세가 아니었다. 일단 거실 반대편 끝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 차차 거리를 좁혀갈 요량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갓난애한테 된통 혼쭐이 나고, 구석 방으로 추방 당해 옹기종기 앉아 있는 꼴이 가여웠지만,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들을 만나서 반가웠고, 아기가 낯을 가려서 기뻤다.
거리가 멀어지자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왼쪽 팔뚝에 찌릿 통증이 밀려왔다. 아기의 손이었다. 낯선 사람을 보고 겁을 먹은 아기가 내 팔의 야들야들한 안쪽 살까지 움켜잡았던 것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이 밀려왔다. 그래! 내가 네 엄마야! 우리는 마치 새끼 원숭이와 어미 원숭이 마냥 서로를 와락 끌어안고 있었다.
삼인조와 눈만 마주쳐도 악악 대며 울었다. 이대로라면 몇 마디 대화도 못 나누고 헤어질 판이었다. 그럴 순 없었다. 얼마만의 바깥세상 인간들인데.
그들에게 거실로 나오라고 했다. 우르르 나옴과 동시에 폭발적으로 울어대는 아기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숨까지 할딱거리며 얼굴이 빨개지도록 우는 아기가 안쓰러웠다.
문간에 대고 삼인조에게 말했다.
"셋이서 무슨 이야기든 하고 있어 봐. 소리 들려주면서 익숙해지게."
삼인조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극을 펼치며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너무 웃겨서 데굴데굴 구를 판이었지만, 처음 만난 어른 세 명의 목소리가 방문을 통과해 들려오기 시작하자 아기의 눈빛에 다시 두려움이 번졌다. 눈을 부릅뜬 채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청각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네? 아까 그 이모랑 삼촌들이야. 무섭지 않아. 괜찮아. 괜찮아."
방 안에서 아기를 안고 천천히 흔들었다. 밖에선 계속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제 제법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기의 긴장한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 같았다. 문을 조금 열었다. 삼인조 중 여자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뿔싸.
왕! 울음을 터뜨렸다. 문을 닫았다. 그들에게 아기를 아는 척하지 말라 일러둔 후, 다시 방문을 조금 열었다. 멀찍이서 그들이 -우릴 애써 외면하며-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아기는 상체를 빳빳하게 세우고 그들을 뚫어버릴 기세로 노려봤다.
30분 가량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방 문을 계속 조금씩, 조금씩 더 열었다. 완전히 활짝 열고도 잠시 그대로 있었다.
어느 순간, 아기가 천천히 나에게 몸을 기댔다. 먹구름 개듯 표정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나도 그들 대화에 합류했다.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아기는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엄마의 얼굴을 봤다.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삼인조의 목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돌려 말하는 사람을 보고, 곧 다시 내 얼굴을 살폈다. 낯선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엄마의 표정과 기운을 살폈다. 괜찮다고, 안심해도 된다고 아기의 눈을 마주치고 활짝 웃어줬다.
마침내, 아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천천히 삼인조 곁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아기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만난 지 두 시간을 훌쩍 넘긴 다음에야 아기를 품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남자 1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자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줄도 아네?" 여자가 말했다. 다 같이 하하호호 웃었다. 함께 집 앞 카페에 가고, 삼촌들의 품에 안겨 사진도 찍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렇게 해질녘까지 함께 했다. 우리는 깍깍대고 파닥거리며 웃었다.
*
아기가 삼인조를 향한 경계심을 완전히 내려놓은 건, 엄마가 그들의 이야기를 편안하고 즐겁게 듣고 있다고 느꼈을 때부터였다. 그때 아기는 안심하고 낯선 이들을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세상과 소통하는 엄마의 태도는
아기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돼 준다.
적당한 경계심은 방어막으로 삼고,
용기와 호기심을 양손에 쥔 채
두려움 없이 마음을 섞을 수 있길 바란다.
나보다 더 일찍,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