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가 떡볶이가 아닌 곳에 살고 있습니다
‘순정, 이거 집에 가져 가서 너무 먹고 싶을 때 먹어.’
S언니는 종이 용기에 담긴 인스턴트 떡볶이를 건넸다. 나를 다정하게 ‘순정’이라고 부르며 떡볶이를 건네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리 없지만 S언니는 단순히 ‘좋은 사람’이라고만 표현되기 아까운 사람이다. 나는 그를 이 낯선 섬에서 만났다. 어른이 되고 만난 사람들 중 S언니는 나에게 ‘이것이 바로 어른의 우정이다’ 라는 것을 처음 알려준 사람이다. 이 언니는 딱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의 다정함을 쏟아붓는 사람이다. 우리는 여기서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아끼고 존중하고 같이, 또 따로 보냈다. 가끔 서로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고, 반찬을 나눠 먹기도 했고, 캠핑도 같이 다니기도 했다. 실제로는 S언니보다 더 자주 만나는 친구들이 있지만 내 마음 속에선 어쩐지 언니가 그 친구들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했다. 어른의 우정은 그렇다. 만남의 빈도가 마음의 크기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서로에 대해 닮은, 그래도 미묘하게 다른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 물론 상대를 오해하거나 서운한 감정을 갖기도 했다. 언젠가 언니는 서운했던 마음을 전화로 털어놓았다. 나는 당황했지만 악감정이 될 때까지 서운함을 묵혀두거나, 나 없는 곳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하소연하지 않으려고 애쓴 언니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를 부르는 방식조차 다정하다. ‘순정아’(이건 왠지 친하지만 조금은 격식차리는 사이의 느낌이다.) , ‘순댕’(아빠가 나를 부르던 애칭인데 어떻게 친구들 사이까지 이 별명이 퍼져 나간건지는 미스테리.), ‘야’(나를 이렇게 부르는 애들은 왠지 대체로 웃기다.), ‘순정씨’(순정씨라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갑작스레 괴이한 기분이 든다.) 등등 많은 방식을 두고 담백하게 ‘순정’ 하고 부른다. 그럴 땐 그저 그렇던 내 이름이 갑작스레 로맨틱해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내 인생 역사를 돌아보자면 기억나는 ‘언니 친구’들이 거의 없다. 나는 언니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타입이다. 이유는 많겠지만, 일단 애교를 잘 못 부린다.(오히려 여자들 사이에야말로 애교가 꽤 중요하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같은거랄까.) 표정 관리도 잘 못 한다. 말이 가끔 무심하게 나온다. 나이 차가 큰 오빠가 있는 집의 막내로 커서 예쁜 짓을 안 해도 예쁨을 받아온 터라 배려심도 좀 없다. 여중&여고를 나오며 오히려 언니들에게 ‘무서운 선배’이미지가 생겨 더 어려워졌다. 이런 저런 까닭으로 나는 ‘언니 친구’가 없다. 그런 면에서 S언니는 특별하다. 7년 째 말을 놓지 못하는 나를, 이젠 베풀고 싶어도 곤궁해서 베풀 것이 없는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준다.
나는 떡볶이를 바라보았다. 떡볶이가 너무x100 먹고 싶은데, 그나마 중국슈퍼에서 가~아~끔 팔던 인스턴트 떡볶이 마저 찾을 수 없어 몇 주 째 우울하던 차였다. 이런 상황에선 ‘떡볶이’는 더이상 ‘떡볶이’가 아니게 된다. 떡볶이는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 가족과 친구들과 쌓았던 추억, 마음의 위로 갖가지 서정적인 의미를 띤 중요한 존재가 된다. 타지에 산다는 것은 그렇다. 그래서 언니가 건네준 떡볶이가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았다. 게다가 떡볶이는 아끼고 아껴진 나머지 유통기한도 지나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떡볶이를 앞에 두고 나는 전통적인 방식의 리액션을 취했다.
-아이~ 왜이래요 집에 두고 언니 먹고 싶을 때 먹지이~
그러자 언니는 한 술 더 떴다.
-쓰으~, 그러지마. 나 서운할라고 그래. 가져가~!
떡볶이를 밀었다 당겼다 서로 실랑이를 하다 우리는 ‘푸흡~우리 진짜 한국인.’하고 웃었고 나는 떡볶이를 가방에 넣었다. 떡볶이는 나의 작은 아파트에서 양배추와 파 그리고 당면의 도움을 받아 진짜 푸짐하고 맛있는 떡볶이로 재탄생했다. 나는 그것을 맥주와 함께 소중하게 음미했다.
30이 넘고 나자, 다정이 다정으로 되갚아지는 삶이 아름다워 보인다. 나의 외할머니, 최영환 여사는 이웃집 할머니와 끊임없이 무언가를 서로에게 챙겨주고 서로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그러다 못 이긴 척 받아들고 또 상대에게 줄 다른 것을 찾아 보는 우정을 20년 째 쌓고 있다. 어릴 적엔 어른들이 왜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서로 주고 받지 못해 안달인지 궁금했다. ‘서로 안 주고 안 받으면 몸과 마음이 편할 것을...’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들이 주고 받은 건 다정이라는 것. 다정은 어쩔 수 없이 비효율적이라는 것. 그래서 다정이라는 것, 그런 것들 말이다. ‘어렴풋이 알겠다’라고 한 이유는 나는 아직 다정 햇병아리, 어덜트 프렌드쉽의 초심자이다. 학교 다니며 매일같이 얼굴보고 미운정 고운정이 절로 들어버리는 어린이 우정과는 결이 좀 다르다. 나는 여전히 주고 받는 것의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 가끔은 나중에 기억조차 나지 않을 계산을 하기도 한 후 쪼잔한 내 모습을 후회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스스로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을 쏟아주고 홀로 뒷감당을 하며 버거워하기도 한다. 어덜트 프렌드쉽의 포인트는 상대에게 지나친 부담은 주지 않되 그래도 상대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 그리고 상대에게 쏟은 마음에 스스로 압도되지 않는 평정심. 떡볶이를 배불리 먹은 나는 다정과 조화(harmony)를 다짐하며 나는 다음 번엔 S언니에게 무얼 줄까 골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