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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Apr 11. 2021

구름의 딸, 나무, Egg cup



뉴질랜드에서 한달간 히치 하이킹을 하며 여행할 때 이야기다. 


나와 독일인 친구 두 명은 비가 오는 길가에서 목적지를 적은 종이를 들고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내보이고 있었다. 애매한 시간이라 서주는 차는 없었고 가끔 느끼한 아저씨들이 

윙크를 갈기며(갈긴다는 표현이 맞겠다.) ‘거기 그 SWEET GIRL만 태워줄 수 있다’고 희롱을 하며 지나갔다. 한 마오리 할머니가 오래된 도요타를 세웠다. 그는 통통한 볼에 진한 보조개를 보이며 웃는 얼굴로, 

자기도 젊을 적 히치 하이킹을 한 적이 있다며 유쾌하게 ‘hop on!’ 외쳤다. 

우린 염치불구하고 그의 정원에서 텐트를 치고 묵고 가도 괜찮을지 물었고 그는 예의 웃음을 보이며 

남은 방이 여러 개 있으니 안에 들어와서 자라고 말했다. 그는 너무도 쉬운 일 처럼 낯선 젊은이 세 명을 

집 안에 들이고 음식을 배불리 먹였다. 그의 이름은 Hine Awe였다. 

히네 아웨. 마오리어 사전을 찾아보니 Hine는 어린 소녀 혹은 딸 Awe는 하얀 깃털 혹은 구름을 의미한다. 

구름의 딸. 시같은 이름이다. 그의 부모와 부족 사람들이 사랑을 담아 지은 이름일 것이다. 

그 어린 딸은 머리가 희어지고 손이 두툼하고 거칠어 졌지만 아직도 해말갛게 웃고 있었다. 

같이 TV를 보다 사진을 찍었는데, 그러길 잘했다고 두고두고 생각한다. 

그는 마오리에 얽힌 전설도 이야기 해주었는데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그 이야기를 들었다.

동화같은 이야기였다. 



그가 말한 남은 방은 출가한 그의 자녀들의 방이었다. 벽에는 그 자식들의 자식, 즉 그의 손주들이  

그린 그림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아마 꼬마였을 아이들이 눕던, 성인이 되어 큰 도시로 나가고 

가끔 방학이나 휴가를 맞아 찾아와 누웠을 고향 집의 침대에 몸을 눕혔다. 

여독이 풀려 몸이 노곤노곤한데도 이상한 행복감에 들떠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에 부엌에 나가자 사람들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는 작고 예쁜 컵에 삶은 달걀을 넣어 건넸다. 

컵이 달걀에 꼭 맞는 크기였다. ‘egg cup’이라는게 존재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는 달걀 윗쪽 껍질 부분을 포크로 툭툭 깨어 벗겨냈다. 안에는 반숙되어 젤리같은 노른자가 반짝거렸다. 

소금 톡톡 후추 톡톡.  따끈한 빵을 찢어 노른자에 찍어 먹으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출근길에 우리를 도시 외곽까지 태워다 주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Hine awe와 우린 이별했다. 

나무 이름도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는 우리를 하나씩 안더니 눈물을 찍어냈다. 

자기 딸이 독립할 적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러더니 우리보고 부모님께 연락 좀 자주 하라며 

귀엽고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때 막 한국에서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적이었다. 

모든 것이 생경한 와중에 그녀의 눈물이 가장 생경했다. 나를 어제 본 사람이 나와의 작별을 

이렇게 아쉬워 하는 마음, 자신의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뭉클하고 따뜻했다. 

햇살도 따사로와서 그날의 기분은 꼭 막 몽글몽글 만들어진 손두부같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그녀에게 엽서도 보냈다. 그녀에게 답장이 왔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오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의 나는 일상이 뒤흔들리는 무수한 경험을 하며 

눈부시게 변화하고 배우느라 몸과 마음이 바빴다.  




그 후로도 가끔 우리가 헤어지던 커다란 나무와 그의 젖은 속눈썹 혹은 egg cup 속의 

폭신한 노른자가 가끔 생각난다. 이상하리만치 모두가 날카롭고 내 마음마저 뾰족뾰족한 날엔 

더 의식적으로 생각해본다. 그런 기억들이 결국엔 삶의 양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지친 날에 비상식량같은 존재가 된다는 건 참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런 영광을 차지하는 날이 올까? 이미 왔을까? 


타인에게 양분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어려운 욕심이 솟는 설레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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