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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Apr 11. 2021

섬에 살 운명의 아이


물에 대한 가장 첫 기억은 아빠 근상의 등허리에서였다. 그는 어른 무릎 깊이까지 오는 계곡물을 엉금엉금 기어 다녔고 나는 그의 등에 올라타 작은 이빨 사이로 침을 흘리며 웃었다. 그는 코로, 입으로 들어오는 계곡물을 신경도 쓰지 않으며 하마처럼 물속을 거닐었다. 우린 매년 여름마다 계곡으로 캠핑을 갔다. 가끔은 외삼촌 가족들과, 가끔은 근상의 친구 가족들과 떠났다. 근상이 직접 볼을 부풀리며 튜브에 바람을 불어넣어주었다. 튜브는 보통 깊은 물에 들어갈 수 있는 쿨한 인간들(오빠와 오빠 또래 친구들)의 몫이었고, 나는 참방 거리는 물속에 고개를 묻고 다슬기를 주웠다. 우리 고향 청주에선 다슬기는 올갱이였다. 가끔 돌 밑에 와글와글 숨어있는 올갱이들을 발견하면 나는 물안경을 쓴 채 엄마 진희에게 야무지게 따봉을 했다. 진희와 이모들은 돗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끊임없이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내가 고개를 쳐들고 엄지 손가락을 내보일 때마다 진희는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같이 앉은 이모들에게, 쟤는 입술이 푸르뎅뎅한데도 안 나오네, 소곤거렸다. 나는 허약한 아이였다. 아침마다 근상이 직접 잡은 붕어를 진희가 푹 고아서 만든, 2n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맛을 떠올리면 치를 떨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수프를 마셨다. 그 마녀수프와 한약을 번갈아 가며 먹었는데도 8살의 나는 16kg이었다.



10살의 여름엔 계곡 대신 동해바다에 갔다. 청주에서 가까운 서해는 몇 번 갔다지만 동해의 그 파란 물을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이란. 그 파란 물이 우르르 달려들더니 다시 와르르 내빼는 것을 나는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았다. 나는 그때 알았다. 바다를 사랑하게 된 것을. 그 단 한 번의 마주침으로 나는 사랑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근상은 어린 딸의 보들보들한 발바닥이 데일 것을 염려해 나를 업고 달구어진 모래사장을 뛰어다녔다.


그렇게 바람 불면 날아갈세라 꺼질세라 키운 막내딸이 저 멀리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섬에 들어가서 살겠다고 했을 때 근상은 어땠을까. 이 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가 보낸 문자에 눈물을 쏟은 기억이 난다.


«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아빠가 여기 있잖아 » 


나는 그 짧은 문장의 자음과 모음, 모든 획에서 근상의 절제된 사랑을 느꼈다. 이제는 계곡물아래 울퉁불퉁한 자갈밭을 대신 거닐어 줄 수도, 달구어진 모래사장 위를 업고 대신 뛰어줄 수도 없는 근상이 애닳는 마음으로 쓴 것이 저 문장일 테다. 막상 와서 살아보니 기대와 너무 다른 생활에 지치고 찌들었을, 하지만 근상과 진희가 걱정할까 봐 괜찮은 척하고 있을 막내딸을 그는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생활을 자세히 묻는 것조차 고심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답했다.


« 바닷가 사니까 너무 좋아. 나 물 좋아하잖아.» 


이 곳에서 해수욕을 하던 어느 날, 저 멀리 커다랗고 느린 생명체를 보았다. 그 커다란 동물은 마치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풍선처럼 둥실둥실 나에게 다가왔다. 그가 5m쯤 떨어져 있을 때 나는 그 동물이 듀공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작고 처진 눈과 넙적한 콧구멍, 웃는 듯한 입이 보였다. 이 제법 귀엽고 온화한 얼굴을 한 듀공은 서두르는 기색도, 피하려는 기색도 없이 내 앞을 다시 동실동실 떠서 지나갔다. 듀공이 내 앞을 떠갈 때 나는 그를 쓰다듬었다. 듀공의 피부는 생각보다 사람 피부와 비슷한 질감이었는데, 다만 여기저기 깊은 흉터가 많았다. 손가락으로 흉터 하나를 천천히 만지는데 근상의 생각이 났다. 나를 등에 앉히고 하마같이 물속을 거닐던 30대의 근상과 남태평양의 바다에 사는 귀엽고 신비로운 듀공, 그리고 그 시절 근상의 나이가 되어가는 나 모두가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 


근상은 나의 10살 여름, 근상이 이어준 바다와 나의 사랑을 알았을까? 바꿀 수만 있다면 과거를 바꾸고 싶을까? 푸른 동해바다 대신 63 빌딩의 아쿠아리움으로 귀한 딸을 데리고 가고 싶을까? 


오랜 시간 동안 근상과 진희를 초대할 여유조차 없이 살다가 마침내 금전전 여유가 조금 생기자, 이번엔 바이러스가 국경을 차단했다. 나는 하루빨리, 좀 더 정확히는 하루라도 더 그들이 젊고 건강할 때 이 곳을 보여주고 싶다. 듀공을 보여주고 싶다. 근상이 사랑하게 만든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 당신들이 정성스레 키운 딸이 이 곳에서 다시 정성스레 삶을 가꾸고 있다고, 이제 마녀수프나 한약없이도 튼튼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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