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니 Apr 11. 2021

순정의 삶


순정은 제가 평생 가지고 산 이름입니다. 

일생을 가지고 산 이름에 대해 호감이나 불호감을 가진다는 표현은 좀 어색하지요. 

저는 선택권 없이, 태어나서 늘 순정으로 불렸으니까요. 순정이라니. 

어쩐지 촌스럽고 낭만적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너무 한쪽 성별에 치우친 이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난 12년간 신생아 중 단 18명만이 순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걸 보면 

분명 인기 많은 이름은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18명의 신생아 중 15명은 여아입니다. 

지나치게 여성적인 이름이라는 점이 이제 와 썩 내키진 않지만, 

저는 가끔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저의 부모가 작은 고구마 같았던 아기(아빠 근상에 의하면 저는 정말 마른 땅에서 캐낸 쭈글쭈글한 

고구마 같았다고 합니다.)를 보며 ‘순정’을 떠올린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고 세상의 질서에 순응해서  밝고 행복하게만 살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요. 

제가 어렸을 적 근상은 자주 노래를 불렀습니다.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제가 다니던 삼정 학원 아래층에서 슈퍼마켓과 떡볶이집을 하던 여자도 저를 보면 늘 흥얼거렸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수~운~정


아파트 같은 통로에 살던 5층 아주머니도 엘리베이터에서 저를 보면 반가운 얼굴로 노래를 불렀죠.


-장미꽃보다도 붉은 열아홉 순정~이래요


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마 노랫가락으로 남은 아이일 것입니다.

 그것이 유년시절에 그친 이유는 코요테 <순정>을 끝으로, 2000년을 넘어오며 더 이상 

노래 가사에 ‘순정’따위를 집어넣는 일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보다 더 재밌는 주제가 많아졌거든요. 

유혹이라든가, 원나잇 스탠드라든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세간의 말처럼 인생이 이름을 따라간다면, 저는 순(順)하고 밝은(晶) 사람이어야 할 텐데요. 

제 이름의 뜻을 말해주었을 때 고개를 갸웃거리던 동거인의 얼굴이 퍼뜩 떠오르네요. 

네, 저는 순응적이지도, 밝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오히려 삶의 방식은 순응보단 ‘저항’에 가깝고, 

유머 코드는 사카스틱(sarcastic)한 편입이다. 저는 순정적인 삶을 살고 있진 않지만 

순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자연의 순리(順理)를 되돌리기 위해 공장식 사육과 과소비, 

파괴적 소비를 지양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더 많은 생명이 공존할 수 있는 밝고(晶) 따뜻한 세상을 꿈꿉니다. 

일상의 저는 너무 많은 고통에 집중하고 있는 부정적인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빛을 밝히기 위해선 기꺼이 어둠으로 기어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얼마 전 친구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밤톨 같은 아이의 사진을 보내왔는데, 낯선 세상을 집어삼킬 듯 

바라보는 초록빛의 동그란 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친구는 저에게 한국식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며, 

‘율’이라는 이름이 어떨지 묻더군요. 저는 말했습니다.


-율에는 많은 의미가 있지만 그중에 melody(가락)라는 의미도 있어. 율은 삶을 즐거이 노래하는 사람이 될 거야, 힘들거나 어두운 시절에도.


기뻐하는 친구를 보며 또다시 작은 아기에게 ‘순정’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설레하는 부모를 상상해봅니다.

이름 안에 그들이 담아내는 희망과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저는 또 순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 용기를 얻는 셈이지요. 

이전 04화 떡볶이 같은 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