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1학년 때 엄마와 함께 담임 선생님의 집에 간 기억이 난다.
우리는 낮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담임 선생님은 엄마 앞에서 나를 칭찬했던 것 같다.
나를 잘 부탁한다며 엄마는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선생님이 어떻게 반응했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유, 어머니, 뭐하러 이런 걸!", "넣어두세요. 그냥 성의예요." 이런 말들이 오갔던가.
때때로 방과 후 나를 남겨두고 따로 칭찬을 해주던 선생님의 따뜻함 뒤에는
흰 봉투와 맞바꾼 시장 논리 같은 것이 있었을까. 나중에 촌지 문제가 불거져 뉴스에 오르내리고 나서야
우리 엄마가 내민 것도 촌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론 어찌어찌 나 또한 남을 가르치는 업에
발가락 정도를 담그고 있지만, 솔직히 교육자라는 존재에 대해 큰 기대는 없다.
특히 요즘같이 누구나, 무엇이든, 어떻게든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시대에는 말이다.
지식을 전승하는 기술자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교육자든 아니든, 좋은 사람은 좋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고,
그 좋은 영향이란 것이 결국 좋은 교육으로 맞닿지 않을까 소망한다.
이 섬에 와서 영문과 수업을 듣던 때에, 남태평양 문학을 가르치는 할아버지 교수가 있었다.
그의 몸은 등이 굽었다기 보단, 내면의 힘을 버티지 못해 등이 솟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는 남태평양 섬의 소설과 시, 크레올을 가르쳤는데, 수업이 무척 널널해 학생들이 좋아했다.
그는 조금 미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남태평양 문학을 사랑했다. 바누아투, 파푸아 뉴기니, 통가 등
식민지를 겪은 작은 섬에서 발생한 문학에 대해 침을 튀기며 말했다.
나는 그 작은 섬들에서도 글은 써지고 읽히고 기억된다는 것이 왠지 놀랍고 감동스러웠다.
그곳의 언어는 식민시절 받아들인 영어가 현지화된 모양새였다.
예를 들면 단어는 영어 단어지만 접사나 동사 변형은 현지식이라던지.
교수는 어쩐지 순진했고, 그의 환심을 사는 건 무척 쉬웠다. 학생들은 가끔 그를 비웃으면서도
손을 들어 시답잖은 질문을 하고 점수를 땄다.
그의 과목을 시험 보는 날, 시험지에는 간단한 질문들이 있었는데, 책을 한 번이라도 뒤적여 봤다면
누구나 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뒷장을 넘기자 여백이었다.
맨 위에는 '아름다운 시를 쓰라'는 지시사항뿐이었다. 이미 간단한 질문에 답할 때부터 심상치 않던
내 아랫배는 이제 꾸룩꾸룩 소리를 내며 안에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과민한 대장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펜을 톡톡톡 치던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시를 휘갈기고 나왔다. 싸이월드적 감성을 쥐어짜 말 그대로 5분 만에 쓴 시였다.
며칠 후 받은 나의 점수는 만점이었다. 시 아래에는 그가 큼직하게 적은 'beautiful!'이 보였다.
시험 다음 주 그가 시험 결과를 나눠준다며 학생들을 모았고 내게 시를 읽어 달라고 했다.
나는 남의 앞에서 손가락 끝이 쭈뼛해지는 시를 읽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열정 가득한 눈과 기대에 찬 입꼬리를 실망시키기 어려웠다.
시를 읽었고 그는 무척이나 감동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누군가가 내 시를 읽고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의 수업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어제까지.
대학을 같이 다니던 학생의 페이스북에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왜 죽었을까. 요즘 유행하는 그 병일까, 혹은 그저 노환이었나. 꽤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긴 했으니까.
어찌 죽었건 그의 영혼은 아마 풀풀 날아다닐 것 같다. 점잖게 걷거나, 신나게 동동거리는 영혼도 있겠지만
그의 영혼은 조금은 빛에 홀린 나방처럼 풀풀 날아다닐 것 같다.
그가 원하던 아름다운 시와 땀냄새 가득한 숲으로 풀풀 말이다. 그를 생각하며 시를 써야지.
엉뚱한 애도보단 그게 그에게 더 어울리니까. 시를 쓰게 만든 이에게 시를 바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