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길을 걷다 보니,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내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관계 속의 나는 조금씩 수정되고 단련되며 변화해 왔다. 특별할 것 없는 역할을 감당해 내며 부딪히고 다듬어지는 과정이었다. 끝이 있는 관계는 늘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졌고,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 속에서 나는 점점 관계의 의미에 무감해졌다. 그래서였을까. 복잡하고 진지한 관계보다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가벼운 관계를 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쓰며 깨달았다. 바로 그 복잡하고 진지한 관계 속에서 내가 성장해 왔음을. 그리고 어떤 관계는,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올해 추석, 나는 친정집으로 내려가 대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식들이 결혼 후 집을 떠난 뒤, 엄마의 집에는 우리가 남긴 묵은 짐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엄마는 손때 묻은 노트나 책 한 권조차 쉽게 버리지 못하고, 창고 깊숙한 곳에 정성스레 보관해 두셨다.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한 남동생의 짐부터 꺼내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얽힌 물건들을 하나하나 분류하고 버리다 보니, 어느새 일곱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 끝에서 유소년기의 사진첩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아래에서 오래전 잊고 지냈던 아빠의 유품 가방이 나타났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브라운색 서류케이스. 아빠가 돌아가신 지 35년이 넘었건만, 가방은 여전히 단단하고 온전했다. 어린 시절엔 이 가방을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빠는 이 가방에 무엇을 담고 다니셨을까?'
청소를 마친 뒤, 우리는 마주 앉아 그 가방의 기억을 열어보기로 했다. 비밀번호를 알 리 없으니, 우리는 공구를 꺼내 들었다. 철컥, 작은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고, 잠자고 있던 시간의 조각들이 세상 밖으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방을 열자 오래된 냄새와 함께 지난 시간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대학교 학생 수첩과 생산사원 교본, 회사 카탈로그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고, 한 사람의 성실한 생애가 정돈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빠는 분명 단정하고 꼼꼼한 회사원이었을 것이다. 희고 빳빳한 명함, 단정한 시계, 가지런히 꽂혀 있는 볼펜들 - 그 모든 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88 서울올림픽 기념품은 여전히 새것처럼 빛났고, 전역증과 군번줄, 그리고 이름이 새겨진 국민은행 카드도 있었다. 엄마조차 처음 보는 카드였다. 당시 밖의 일에는 관심 둘 여유가 없었던 엄마는 그제야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이런 게 있었는지도 몰랐네." 시댁살이, 육아, 살림으로 바빴던 세월이 그 짧은 말에 모두 담겨 있었다.
무뚝뚝했지만 따뜻하고 가정적인 아빠는 <생활실용백과>를 참고하며 든든한 가정을 만들고자 애썼다. 어려운 형편 속에도 상고에 진학했고, 성적이 우수하고 리더십도 뛰어났지만 생계를 위해 일찍 취업해야 했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영어로 된 <노인과 바다>, 일본어 원서 <조선전쟁>, 낡은 사전 몇 권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이엔 종이인형의 원피스로 보이는 작은 종이 조각이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다. "이거 언니가 어릴 때 아빠한테 준 거 아니야?" 나의 말에 방 안의 공기가 잠시 멈췄다. 언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랬던 것 같아. 내가 준 것 같아." 아빠가 딸의 마음을 고이 간직해 왔던 것이다.
책 더미 속엔 <한국 100 명산>이라는 책도 있었다. 등산을 좋아하던 아빠는 주말마다 산을 찾곤 하셨다. 백산 중 절반쯤은 올랐을까? 회사 통합으로 서울로 출근지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빠는 위암 진단을 받으셨다. 서울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예후는 좋지 않았다. 그 후 한 달 남직 이어진 <병상일지>에는 아빠의 필체로 기록된 고통의 순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간마다의 증상, 감정, 그리고 회복에 대한 희망이 섬세히 남아 있었다. 병상에서도 '약이 되는 자연식'을 공부하며 필요한 부분을 정리하고 발췌해 놓으셨다. 아마 퇴원 후 건강 관리를 위해 엄마에게 보여주려 하셨을 것이다. 고통 속의 잠 못 드는 밤, 병실의 불빛 아래에서 엄마에게 보낸 짧은 시 한 편은 무심한 듯하지만 깊은 사랑이 스며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그 시를 지금껏 읽어보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살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와는 달리, 병세는 빠르게 나빠졌다. 병원에서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두 달 뒤,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작은 서류 케이스 안에는 살기 위한 의지, 배우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가족을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 가방 앞에서 오래도록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치 그 속에서 아빠의 숨결이 아직 잔잔히 흐르고 있는 듯했다.
아빠의 유품을 정리하며, 우리는 아빠의 기질과 성향, 삶에 대한 태도와 정신을 고루 닮아 있는 우리 남매의 모습을 새삼 발견했다. 한참을 웃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국민학교 1,2, 3학년 밖에 되지 않았다. 아빠를 통해 직접 배운 것도, 아빠의 목소리도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우리는 아빠가 세상을 떠나시던 나이보다 훌쩍 커버렸다.
유품 속에서 찾은 사진 한 장, 그 속의 아빠 얼굴이 남동생의 얼굴에 겹쳐졌다. "지 아빠랑 똑같다." 엄마의 말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외국어를 좋아하는 것도, 아빠가 종이에 써놓은 한자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빠의 영향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아빠의 흔적을 바라보던 엄마는 조심스럽게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꺼내셨다. "이거 한번 틀어 볼까?" 가장 힘들었던 그날의 영상을 다시 볼 용기를 낸 듯했다. 테이프에는 아빠의 장례식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낡은 비디오플레이어는 이미 고장이 난 지 오래였다.
그때 문득 동네 미디어 센터에서 "비디오를 파일로 변환해 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엄마에게, 그 영상 파일을 꼭 만들어 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장례식 테이프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술의 발전이 과거의 기억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에 묘한 설렘이 일었다.
영상 파일로 변환되는 동안, 장례식의 장면들이 화면에 잔잔히 흘러나왔다. 영상 속에서도 아빠는 이미 영정사진으로만 존재했다. 집에서 치른 장례라 오래된 집의 마당과 골목, 담벼락까지 눈에 선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빈 관이 방으로 들어오고, 다시 나와 마당을 지나 골목을 따라갈 때까지 엄마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던 엄마, 병수발에 지치고 야위었던 그 얼굴은 화면 속에서도 처연했다.
당시 우리는 너무 어려서 슬픔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수많은 손님들 속에서 어리둥절해하며 서 있던 아이들, 그중 막내는 산소 옆에서 쌓인 돌로 장난을 치기까지 했다. 카메라는 오열하는 엄마와 덤덤한 아이들을 번갈아 비췄고, 어른들의 눈빛에는 애도와 막막함, 그리고 남겨진 가족에 대한 연민이 어려 있었다.
나는 아빠가 세상에 없어진 순간, 부녀의 관계도 끝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상을 보고 난 후,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가족이 존재하는 한,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를 바꾸어 복사되고, 이어지고, 연결된다. 아빠의 병상일지를 읽고 이 영상을 다시 보자, 그것은 더 이상 끝의 장면이 아니었다. 오히려 관계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나는 아빠의 정신을 느꼈다. 그 정신이 내 안을 흐르고, 다시 내 아들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렇게 세대를 건너 관계를 이어가며 살아간다.
죽음이 관계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