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 하나가 남긴 것
나를 오래 따라다니는 상처는 고등학교 때의 별명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야, 너 언제 와 있었어? “ “별명답네, ‘슬그머니’ 크크크크”
낯선 학교, 낯선 교복, 고등학교 1학년이 된 그날이다.
낯선 교실에서 번호 순서대로 키가 크지도 않은 내가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
친구들의 낯선 뒤통수를 바라보며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하던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17번 친구는 공교롭게도 같은 성당에 다니는 친구다. 몇 달 전 17번 친구는 내가 다니던 성당 청소년부에 들어왔다. 유독 활발하고 털털한 성격으로 성당 친구들과 금세 친해졌다. 학창 시절에 집과 학교 말고 대부분의 시간을 성당에서 보내던 나였다.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와 낯선 고등학교에서 같은 반 짝꿍이 되었다는 사실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신나는 일이었다.
나는 목소리가 유독 작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내 말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소리를 내는 대신 늘 미소를 짓는 것으로 반응했다.
17번 친구는 목소리가 컸고, 웃음소리도 호탕했다. 체육시간에 100m 달리기를 한 이후로 반 친구들의 우상이 되었다. 출발선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눈앞에는 모래바람이 피어오르며 17번 친구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23초로 들어온 나와 그 친구 사이에는 10초만큼의 차이가 났다. 여자들도 운동을 잘하는 여자를 좋아한다. 멋진 친구와 단짝이 된 고등학교 생활은 단연코 신나는 일이 많았다. 17번 친구는 친구들에게 별명 지어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에게도 지어 주었다. 나를 잘 관찰한대서 만든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별명은 동사를 꾸며주는 부사가 주인공인 명사가 되는 마법을 부려 친구들에게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특이하고 진지하지 않아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관계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슬그머니~ 같이 밥 먹자." "야, 슬그머니, 오늘 우리 집에 가서 놀래? " 우리는 그렇게 학교에서도 성당에서도 언제나 붙어 있었다. 그러나 해가 끝나기 전 별명의 마법은 오히려 저주가 되어 나를 옭아매었다.
1996년 12월, 거리에는 HOT 오빠들의 신나는 <캔디> 노랫소리에 맞춰 엉덩이 춤을 추느라 들썩이는데 나는 하나도 신나지 않았다. 언제나 함께였던 17번 친구가 나를 대하는 느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야, 너 언제 와 있었어? “ “별명답네, ‘슬그머니’ 크크크크”
주변에 웃음이 퍼졌고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학교 친구들뿐만 아니라 성당 친구들도 나에게 얼음장같이 대했다. 모두가 나에게 불만도 불평도 없이 그저 차가웠다. 선이 분명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날 감싸고 있다고 생각했던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17번 친구의 자기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음 해 새 학기가 시작하면서 주변은 따뜻해졌지만 나는 따돌림을 당한 이유를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저 나의 별명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그 부사처럼은 절대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슬그머니 : 남이 모르게 넌지시, 혼자 마음속으로 은근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