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
아주 어릴 때 엄마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었다. 엄마는 "군인이 하고 싶었어"라는 말을 했다. 좀 놀랐지만 우리 엄마라면 아주 멋지고 훌륭한 군인이 되었을 것 같기도 했다. 엄마에게는 대장부 같은 면모가 분명히 있다.
그녀의 아들은 30대 중반이 다 되었고 딸은 20대 후반이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부모님이 포기해왔을 수많은 선택지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꿈이나 미래에 덤덤해졌을 엄마. 스스로를 꺾어서 자식의 손에 쥐어준 사람.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왜 울었냐고 묻는다면 나를 유모차에 앉혀놓고 꺾이는 중이었을 엄마가 떠올라서 울었다고 하겠다. 사회가, 가정이, 내가, 엄마 스스로가 엄마를 꺾었을 텐데. 자식을 낳아야만 겨우 이해할 수 있을 그 마음이 보여서 울었다.
다 어디서 한 번씩 들어보고, 겪어본 일들이다. 우리 엄마도 서울에 올라와서 미싱을 했고, 지금도 미싱으로 돈을 번다. 나는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릿터에 가끔 에세이 응모를 하긴 하는데 아직 글이 실리지는 않았다. 아르바이트 퇴근길에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고 쫓아와서 경찰에 신고해본 적이 있고, 순찰을 강화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화장실의 의미 모를 구멍들이 휴지케이스를 달려고 낸 구멍인지, 카메라가 숨어있는 구멍인지 살펴볼 새도 없이 그저 두 눈을 꼭 감은 채 볼 일을 보고 도망치듯 나온다.
<82년생 김지영>에 나오는 일들이 누군가에게 그저 남의 일이듯, 나에게도 '남의 일'이 있다. 내가 겪기 전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구태여 마음 아파하기엔 세상 살기가 너무 퍽퍽하다. 이 영화를 보고 울고 소리치는 것은 공감하는 이들의 몫이요, 공감하지 않는 자들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건 욕심 같기도 하다. 그저 영화에 나오는 남편 대현(공유)처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고맙겠다. 그게 남의 일에 대한 타인의 최선임을 이제는 알겠다.
지영(정유미)의 딸이 저절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듯 지영도 저절로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도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린 생명은 보살핌이 필요하고, 지영은 '김지영'으로 존재할 필요성이 있으며, 훌륭한 일꾼은 수많은 성공과 실패로 인해 만들어진다.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돈을 번다는 일차원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지영은 딸도, 남편도, 친정 식구들도 사랑하지만 가끔 오후의 햇빛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을 때가 있다. 사람은 사랑만 먹고는 살 수 없는 것이다. 가끔은 사회에서 주는 성취감도 먹어야 하고, 출근하는 바쁜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 환승구역을 오르내릴 때도 필요한 것이며, 적은 금액이라도 인간 김지영으로 번 돈이 통장에 찍힐 때가 있어야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인해' 살아갈 수 있는가?
여자가 하는 일과 남자가 하는 일의 구분 때문에 싸우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나는 과일(특히 수박)을 잘 깎는 남편을 만나고 싶다. 나는 설거지가 재밌으므로 설거지를 맡고 싶은데, 요리는 잘 못하므로 요리가 취미인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만약 아기를 낳으면 아빠와 엄마의 성을 둘 다 붙이고 싶다. 그래도 괜찮다는 사람이면 좋겠다. 성이 두 개여도 이상하지 않을 이름으로 지을 자신이 있다.
세상은 정반합으로 굴러간다. 정正과 반反으로 인해 결국은 더 나은 합合을 만든다. 더 나아지게 되어있다. 이것은 필연이다. 나는 페미니즘의 소멸이 페미니즘의 합이라고 믿는다. 언젠가는 없어지리라.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전에는 그렇지 못했듯이, 많은 것이 당연해지리라. 그리하여 먼 훗날에 인문학 강의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배우는 다음 세대들이 나오리라.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했다. 어느 책의 제목이 떠오른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