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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Sep 11. 2021

순종, 조선왕조 500년 그 마지막 날의 왕.

제 27대 왕 순종.

1910년 8월 29일 이후 93년이 흘렀다. 2003년 8월 29일에 우리 집 큰 딸 선영이가 태어났다.


보통 역사적 사실과 연도를 오랜 시간 동안 기억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1910년만 기억하고 딸아이 생일을 떠올리면 경술국치를 쉽게 기억할 수 있다.


1910년 8월 29일, 무슨 일이 있었나..

                            -  지식백과 -


그날 이후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일제 강점기를 겪어야만 했다.


순종 (27대 임금, 대한제국 2대 황제)이 재위하는 기간 동안 한일 합방조약으로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순종은 1874년에 태어났다. 당시 나라 상황은 흥선대원군 (할아버지) 탄핵되고 고종 (아버지)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명성왕후 (어머니)에 의한 민 씨 세력의 세도정치도 다시 시작됐다.


조선을 두고 프랑스, 미국, 청나라, 러시아, 일본이 서로의 이권을 위해 각축장을 벌일 때 우리 정치는 척화비를 세우며 다시 시작된 세도정치로 인한 권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개항에 대해 긍정적인 논의를 하고 군대를 더욱 키워 외세에 대항할 힘을 키워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동학 농민운동과 임오군란,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발행 등으로 민심은 흉흉했고 국가 재정이 파탄 났다.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선 건 흥선대원군과 고종, 민비의 잘못이 크다. 사실 순종은 나라가 이지경에 이를 때까지 그저 바라만 볼 수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뭘 어떻게 해보려 해도 이미 벌어진 일들을 수습하는 건 시도조차 불가능했다.


심지어 아버지 고종과 함께 독살될 뻔하기도 했다. 커피에 다량의 마약을 섞은 독살 시도가 있었다. 커피 애호가인 고종은 평소 마시던 맛과 달라 얼른 뱄어 버렸지만 순종은 의도치 않은 마약을 섭취했다.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순종은 이가 빠져서 젊을 때부터 틀니를 껴야만 했다고 한다.


                   고종.                                      순종.


순종은 1874년 ~ 1926년 (52세)를 살았다. 1910년 , 36세가 되던 해에 강제로 한. 일 합방을 해야 했다.


잠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고종과 순종의 기록은 일제 침략기에 편찬되었으므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을 들여다본다.


1910년 8월 22일 순종 3년.


<한일 합병 조약이 이루어지다.>


일 한 병합 조약(日韓倂合條約)이 체결되었다.


<병합 조약(倂合條約)>


한국 황제 폐하(皇帝陛下) 및 일본국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양국 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각각 그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한다.


위의 전권위원은 회동하여 협의하여 다음의 여러 조항을 협정한다.


(제1조)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중략)


(제8조)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한일 협정서에 대한 내용이 실록에 있다. 제1조 항을 읽어보면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완전히 또는 영구히 맡긴다 라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순종 3년.


<일본국 황제에게 한국 통치권을 양도하다>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중략)...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 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짐은 순종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통치권을 일본에게 넘겨주니 동요하지 말고 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이다.


순종이 이렇게 말을 했을 리는 없다. 실록을 일본이 왜곡했다. 실제로 조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 순종이 옥새를 주지 않아서 효력이 없는 고종 것을 가져와 강제로 찍었다고 한다.한일합방 이후 순종은 황제가 아닌 이왕으로 강등되었다.


1910년 ~1926년까지 16년 동안 나라를 잃은 왕으로서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이미 선대에서 나라를 말아먹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치지만  왕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무능함에 대한 비판은 고개를 끄덕이게도 한다.


순종은 당구를 좋아했고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그는 실내 스포츠를 즐겼는데 당구를 잘 쳤다고 한다.


당구는 B.C 400년 경에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지금 우리가 치는 당구는 영국 사람이 쵸크를 프랑스 사람이 큐 에 붙이은 가죽을 발명한 후 급속도로 발전했다.

당구를 칠 줄 아는 분들은 쵸크와 큐 끝의 가죽의 역할에 대해 잘 알 거다.

       쵸크.                                       큐의 끝 가죽.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을 하면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알려진 당구는 ' 옥돌 '이라 불렸다.


1912년 3월 7일, 매일신보 기사에 순종이 일본에서 당구대 2장을 들여와 수시로 당구를 쳤다고 나온다.


또한 1922년 12월 21일 자 조선일보에는 순종의 부인 윤 씨도 함께 당구를 즐겼다는 기사가 실렸다.


당구를 낙으로 삼고 하루하루 나라 잃은 시름을 달랬을 순종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조선왕조 최후의 왕이 비록 망한 나라지만 백성들을 조금이나마 돌보지 않고 당구로 하루하루 소일했다니 비판적인 시각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순종 역시 인간인지라 그나마 당구가 아니었다면 죄책감에 시달려 정신병을 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제 지배하에 조선 백성들은 수십 년간 일본의 만행에 고통받았다. 주권을 상실한 국가의 운명은 엄청난 희생을 요구했고 일부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순종은 아버지 고종 곁에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유릉이 그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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