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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 May 09. 2024

엄마는 기뻐 엄마는 행복해



엄마는 기쁘다 엄마는 행복하다
오늘은 혜민이가 안남 유치원에 처음으로 간 날이다.
혜민이는 아침에 8시에 일어나서 얼른 옷 입고 미역국에 밥 말아먹고 얼굴 살짝 닦고 체육복 하고 운동화 신고 혜성이랑 건영이랑 봉고차 타고 갔다.
가서 문구점에서 색연필, 크레파스, 색종이, 스케치북을 산 다음 유치원 친구들과 같이 교실로 들어갔다.
엄마는 기쁘다. 엄마는 행복하다.

안남유치원 뒤에는 아름다운 푸른 산이 있다.
그런 유치원은 처음 보았다.
헤민아 튼튼하게 잘 다니고 친구들이랑 즐겁게 지내라.
하느님 감사합니다.
올 때는 혜성이랑 마중 가서 그네 타고 있다가 안남 교회로 가서 봉고차를 타고 왔다.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주었다.


    엄마가 90년대생이었다면, 결혼했을까?  

   출산과 육아로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되는 여성의 현실을 고민하며 '세대교체 속에서 뿌리내린 악습을 깨뜨려야 되겠다'라고 단언하던 엄마의 글들을 보면 엄마가 결혼을 안 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엄마가 더 이상 결혼을 필수적인 인생 과정으로 여기지 않는 지금 내 세대의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하다. 비혼주의인 여성으로 살았을까? 혹은 지금은 예전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이니까 아이들 똑똑하게 키우려는 목표를 가지고 끝까지 명함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을까?


    엄마에게 다시 태어나도 결혼할 거냐고 물었을 때 '너희들 만나야 하니까 다시 하지'라는 조금은 심심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지만, 나는 왠지 엄마가 어떤 시대나 어떤 환경에 놓였는지에 따라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아빠를 만나지 않았으면 유학하러 가서 공부를 계속할 수도 있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좋아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그러다가 또 사람을 만나고, 영어를 계속 공부하다가 외국인을 만나 결혼할 수도 있겠지. 다양한 길을 가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내 방과 엄마 방 책꽂이에는 박완서 작가의 똑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취향이 겹치니 신간이 나오면 한 권을 사서 나눠 읽기로 했다. 책을 사서 엄마에게 배송하면 엄마가 먼저 읽고 내가 다음번에 가져가서 읽는데 책을 넘겨받으면 엄마가 읽으면서 한편에 메모해 둔 글씨가 그대로 있다. 박완서의 이야기는 엄마가 옛날얘기 해주던 것과도 닮았다. 6~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책 덕분에 엄마가 학교 다니던 때의 일화가 술술 나오기도 하고, 외할머니가 엄마와 형제들을 기르며 소설 속 주인공 어머니와 똑 닮게 행동한 점도 신나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책에 나오는 혜화동이나 동대문은 우리 가족이 어렸을 때 살았던 종로와도 겹치는 곳이 많으니 그 일대를 배경으로 책에서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공감대를 찾아내는 게 우리 둘의 즐거움이다.



    지금 엄마가 사는 집에는 '명상 방'이라고 불리는 작은 방이 있다. 방에는 붙박이 옷장과 밥상보다 작은 접이식 책상 하나만 있다. 거기서 엄마는 책을 읽기도 하고 성경을 필사하기도 한다. 서재라고 하기엔 텅 비었고 등받이 있는 의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안에서 곧잘 시간을 보낸다. 딸들이 다 상경한 집에는 언제나 치우지 않은 박스와 오래되고 안 쓰는 물건이 널려있는 방이 있었다. 나는 엄마가 방해받지 않은 자기만의 공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엄마는 우리 물건을 보관하는 것이라 했지만, 해야 할 집안일들이 쌓인 주방이나 거실이 아닌 온전한 엄마만의 방이 있었으면 했다. 엄마는 그걸 기억하고 명상 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 칸짜리 좁은 집에서 아기였던 나를 키우던 때부터 혼자 영어 공부하고 글을 쓰던 한 사람. 아무도 없는 집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즐기는 한 사람의 모습에서 확고한 믿음이 든다. 엄마는 어떤 환경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계획했을 것이며, 선택을 후회하더라도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해야 할 이유를 찾았을 것이라는 믿음. 육아 일기장에 생각을 정리 하며 끊임없이 인생에 대해 고민했을 엄마. 분명히 힘든 시간도 겪었지만, 딸들로 인해 큰 행복과 기쁨을 누린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런 순간들을 토대로, 엄마는 다시 태어나도 결혼할 거냐는 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그럴 거라고 답했을 거라 나는 확신한다.




아빠와 엄마는 혜민이의 커가는 모습을 보며
더 없는 행복을 느낀단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감을 갖는다
혜민이가 하루하루 변해가는 모습에
더없는 희망과 기대를 주면서
건강하게 내일을 맞고 지내거라

-혜민이 태어난 지 334일에 엄마가 쓴 글.


자는 모습



박완서 책에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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