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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kerJ Jun 11. 2024

남편 안에 있는 아이를 만나다2

*1,2편으로 나뉘어진 글입니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눈치가 너무 빠른 장남으로, 에너지가 넘쳐서 항상 뛰어다니며 인도로 걷지 않고 어디든 위로 올라가서 뛰어내리던 장난꾸러기였음에도 금새 애어른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갖고픈 걸, 원하는 걸 솔직하게 말하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는 그 작디 작은 가슴 안에 꽁꽁 숨기려 애쓰면서 원하는 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자랐다. 남편은 오랜 시간을 자신이 그렇게 자라온 것이 '물질적 가난'이라고 믿으면서 살았지만 남편의 이야기와 어머님 아버님의 이야기를 다 들은 나로서 내린 결론은 아이가 가지고 싶은 것 하나 못 사줄 정도로 가난했던 게 아니라 집안에 어느 누구도 이 아이의 말에, 마음에 귀 기울여 줄 여유가 있는 어른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우리 애들이 커서 어떤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어?

자신을 잘 아는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기분이 나쁠 땐 뭘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잘 아는 사람. 남들과 잘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과도 잘 지내는 사람.


그건 남편의 응어리가 묻어나는 대답이었다. 아직도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일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이고지고 있는 역할에 눌려 좋아하는 걸 찾을 엄두도 잘 못내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나는 말했다.


여보, 우리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마. 우리 아들, 자기처럼 눈치 빠른 아이인거 알지? 원하는 걸 물어봐도 엄마가 원하는게 뭔지 생각해보는 애야. 그런 우리 아들 대하듯이 자신한테 물어봐줘.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정말 원하는게 뭔지 말해도 괜찮다고 충분히 말해줘. 그 애는 자기 안에 있어.


그 애는 이제 없는 것 같아.

아니야 있어. 너무 오랫동안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하지 못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해서 없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지 분명 있어. 내 말이라도 꼭 전해줘. 이제는 그냥 너로서 행복해져도 된다고. 원하는 거 뭐든 말해도 괜찮으니까 꼭 말해달라고 좀 전해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울고 있었다. 불꺼진 안방 침대 위에 앉아서 남편과 얘기하다 보니 어느 새 성인인 남편의 모습이 아니라 차마 자신이 원하는 걸 사달라, 갖고 싶다 말하지 못했던 우리 아들과 닮은 남편의 아이일 때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래서 남편의 발을 열심히 쓸며 부탁했다. 내 말 좀 꼭 전해달라고... 나는 실제로 상담할 때도 자신에게 차마 애정어린 말, 공감의 말을 아직 못 하는 내담자들에게 내 말을 대신 전해달라고 요청하곤 하는데, 남편에게는 처음이었다. 남편도 내 말을 들으며 조용히,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울었음에도 어쩐지 대화를 나누기 전보다 덜 피곤해진 채로 잠이 들었다. 내심 개운했나보다. 숨김 없는 마음들을 나눈 시간이. 


남편을 깊게 이해하고 나니 다음 날은 일말의 불만 없이 쉬게 해주고, 자유의 시간을 가지도록 내보내줄 수 있었다. 물론 둥이와 하루종일 혼자 있는게 마냥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남편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떠올리며 보냈다. 혹시나 방해가 될까 싶어 연락도 하지 않은 채로 나라면 어떻게 보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실제로 남편은 24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을(1박하고 다음날 들어오라고 했음에도 집에 기어코 들어왔다.)보내고 와서 한결 활력을 되찾았다. 몇 십년을 자신에게 제대로 귀 기울이지 못한 채로 살던 사람이 그러기로 마음 먹는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참 고맙다. 동시에 앞으로 조금씩 더 행복해지고 편안해질 남편과의 생활도 기대가 된다. 남편 안에 사는 아이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그걸 다 들어주진 못해도 귀기울이며 알아주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우리는 서로의 아이도 잘 봐주고 안아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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