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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한 내가 그에게는 원더우먼이 되었다

by AskerJ



많이 컸지만 아직은 어린 5살 쌍둥이와의 일주일간 해외 여행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끝났다. 밤비행기라 녹초가 되어 돌아왔지만 근무시간이 부족한 탓에 남편은 잠시 눈 붙이고 다시 출근하러 나갔다. 안쓰러움을 느낄 여력도 없이 나도 정신 없이 짐정리를 하고, 밀린 빨래를 돌리며 보내다 쓰러져 잠들었다. 그렇게 야근하고 밤이 되어서야 남편과 상봉했다. 내일이 바로 크리스마스라 오늘 애들 자고 나서야 포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느닷없이

내 크리스마스 선물은 뭐예요?

하는 남편. 잉? 해외에서 애들 선물, 교회 가족들 선물도 크리스마스 전에 도착하게 하려고 부랴부랴 주문한 걸 알면서 갑자기 왜 본인 선물 타령...? 조금 벙찐 표정으로 나도 "그럼 내 선물은요...?"하고는 둘 다 웃고 끝났다. 그렇게 정말 내 크리스마스 선물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거 자기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하고 무심히 작은 종이백을 내미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도저히 기대할 틈이 없었던 일정이라 믿기지 않는 얼굴로 안에 상자를 꺼내 열어보니 목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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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떠나기 전 날, 남편이 회사에서 개인 성과 표창을 받았고 더불어 백화점 상품권을 받았는데 현금으로 바꿔 쓰기로 했던 그 상품권으로 내 선물을 사온거였다. 같이 들어 있던 카드의 내용은 더 감동이었다. 편지를 읽는데 정말 올 해의 고단함이 한 번에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많은 사람의 인정보다 내 노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본 단 한 사람의 인정이 훨씬 크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안타까운 건 내가 그 순간의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마치 소처럼 그 순간의 의미를 곱씹고 되새김질 하면서 감동을 우려내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항상 그런 내 감동을 진짜 감동으로 쳐주지 않는 남편은 한 편으로 이번엔 진짜 눈물 흘리나 살피는 듯 했다ㅋㅋㅋ 어쩌겠나 나라도 이것 또한 감동의 다른 형태라는 걸 알아줘야지.


올 해 초부터 돈관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가계부를 쓰고, 부동산 강의를 듣기 시작하고 여름부터는 내 집 마련을 위해 더운 날에도 임장을 다녔던 날들이 있었다. 동시에 가을에 접어들면서는 박사 졸업 준비를 시작하겠다며 재입학을 했고, 그 와중에 상담과 강의를 하면서 육아와 집안일 기본값을 유지하려니 그야말로 몸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속절 없이 늘어나는 미션들에 회의감이 들고 왜 이다지도 내 삶은 산만한가 한탄이 나왔다. 그런 내가 그에게는 '원더우먼'이 되었다. 뭐든 척척 해내는 원더우먼의 이미지는 내가 보는 나의 이미지와 너무도 달라 생경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알아주길 바랐던 모습이었다. 이렇게 정신 없이 매일 뭐에 그리 바쁜지도 모른 채 너덜너덜해져가는데 실상 제대로 하고 있는 알맹이는 없는거 아닐까 하는게 나의 가장 큰 불안이자 두려움이었다. 그 모든 마음에 연고를 발라주듯 안도하게 만든 남편의 편지.


이제는 나도 나에게 그 노고를 알아주어야겠다. 원더우먼인 것도 멋지고, 원더우먼이 아니어도 멋지다고. 사실은 존재함으로도 충분히 괜찮다고. 그냥 지금 이 순간에 호흡하며 살아있는 걸 느끼는 것도 필요하다고. 마침 내 애칭의 이니셜인 D가 매달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스스로에게 자주 그렇게 말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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