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역시 그간 인공수정이며 시험관을 하면서 겪은 절망과 기대의 시간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나 역시 그 시간들이 어렴풋이 기억났고 좀 더 애를 쓰면 더 생생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다.
그간 육아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며 이 아이들을 만나느라 얼마나 몸과 마음이 닳았었는지를 떠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초심을 기억하려고, 기억해서 지금의 고통과 절망 대신에 감사로 바꿔보려고 애를 써 온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별 효과가 없었다.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며 느꼈던 절망은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절망에 비해 너무 멀리 있었고, 그렇게 간절하게 원해놓고 이렇게 힘들어 하냐며 나에게로 화살을 돌리는 좋은 소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간절히 원했다고 해서 힘들어하지도 못하냐며 내 고통을 초심으로 애써 희석시키려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나기도 했다.
우리는 어른이 되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어른이 되고나면 삶의 무게에 지쳐하고, 취업을 원하면서도 막상 직장 생활을 하면 퇴사를 꿈꾸는 그런 존재들이지않나. 나도 좀 그럴 수 있지않나. 하면서 스스로를 비난했다가 그 비난을 비난하며 초심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안하느니만 못한 게 되었다.
지금 나에게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더 행복했을까. 오히려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나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오늘 만난 친구 역시도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는데 아이가 없었으면 남편과 지금쯤 헤어져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고 했다. 심지어 지금 꽤 사이가 좋은 부부임에도.
아이들을 만나지 않은 나는 육아를 하지 않아서 오는 자유가 자유인지도 몰라서 그 자유를 즐기지도 못하고 또 무언가에 매여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무언가 계속 해내야만 할 것 같은 압박 속에서 무언가를 계속 시작하고, 언제 시작했냐는 듯 넘겨버리고는 또 다른 것을 시작하려고 물색하면서 삶은 왜 이리 고달프고 지치는지 절망했을 것이다.
남편과도 더 많은 여행과 데이트를 할 수는 있었겠지만 일상이 여행이 될 순 없으니 아마 일상 속에서는 자신에게 지치는만큼 서로에게도 지쳤을거다. 각자의 뻔한 일상 속에서 나도 너도 더는 새로울 수가 없어서 조바심이 나겠지. 어쩌면 나는 이미 이 시간들을 어느 정도는 겪으면서 지금의 선택을 간절히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전에는 내가 나를 지치게 했고, 지금은 육아와 내가 둘 다 나를 지치게 만들고 있다. 아이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더 행복한건 아니고 덜 지칠 수는 있었겠다 싶은.
대신 더 지치는 지금의 선택은 새로운 기쁨과 감동과 유대가 있다. 때로는 지쳐 그 기쁨과 감동이 덜 느껴질지라도 그 존재는 분명하다.
당연해지기 쉬운 남편과의 관계는 새로운 경험 앞에서 낯선 모습들을 서로 보여가며 바닥을 치기도, 그 바닥으로부터 함께 올라와 새로운 유대의 근력을 쌓아나가기도 한다.
나와의 유대도 마찬가지. 나에게 이만큼 실망했던 적도 없지만 이만큼 감탄했던 적도 없고 나와 이렇게 기를 쓰고 잘 지내보려고 애써본 적도 없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지금보다 더 더 돌아왔을지라도 나는 결국 이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에 이른다.
힘들 때마다 상상하는 그놈의 시간을 돌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가 아니어야 나는 이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나에게는 초심을 회복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다.
오늘도 지지고 볶다가 한껏 피곤한 채로 잠들고는 새벽에 몇 번씩 깨며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이게 나에겐 최고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