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남편과 잘 싸우기

by AskerJ



남편은 자신을 '회피형'이라고 표현하는 걸 인정한 적이 없다. 사실 나도 남편의 회피성향을 점수로 표현하자면 10점 만점 중에 4점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회피형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상대적으로 나에 비해서는 확실히 그런 성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우리는 갈등이 거의 없었던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갈등과 싸움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달랐나 싶을 정도로 갈등대처방법에 차이가 크다는 걸 느끼고 좌절해야만 했다. 그러다 답답한 마음에 무료 부부상담 강의를 듣게 되었다. 대부분의 부부관계에서 나타나는 양상이 추격형/확대자와 최피형/축소자 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너무 공감이 갔다. 한번 화가나면 비난하고 탓하고 못마땅해는 나와 방어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문제를 넘기려 하는 남편.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정반대되는 성격의 사람이나 에너지 표현방식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양상이라고 한다. 왜 이 전에는 이렇게 다른 줄 몰랐을까? 그 때는 서로의 다름을 메꿀만한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편을 조금은 기다려주고, 남편도 필요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돌아와 사과할 여력이. 여력이 없는 지금은 서로의 방식을 인정해주고 양보해줄 수가 없어 더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여력이 없는 한 우리는 계속 이렇게 부딪혀야만 할까? 이 의문을 가지고 한동안 막막한 마음으로 머물렀던 것 같다. 남편은 우선 그 자리를 피하고 더 이상 얘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싸움을 더 크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자신이 필요한 시간을 가지고 마음이 누그러져야 된다고 여겼다. 내 입장을 말하자면 남편의 이유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나는 싸운 그 자리에서 충분히 얘기하고 풀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중간에 자리를 피하는 것은 마치 우리 관계를 포기하고 나를 버리고 간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싸움의 기여도는 둘 다에게 있을텐데 왜 나만 이렇게 참고 기다려야만 할까 억울하고 화나가서 남편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분노게이지는 더 커져만 갔다. 남편은 기껏 마음을 가라앉혔는데 정작 나는 화가 날대로 나서 그런 남편을 또 건드리게 되는 패턴이 계속됐다. 적어도 나는 남편이 언제까진 돌아오겠다, 기다려주면 좋겠다 등의 표현으로 내가 기다리고 참고 있다는 걸 알아주는 말을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또 남편은 그 당시에 그럴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남편 입장에서는 그냥 자기를 믿고 알아서 잘 있어줬으면 하는데 나도 나대로 그러기가 어려웠으니 둘 다 서로가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나름의 해결책을 발견하게 됐다. 그 날도 남편의 말에 기분이 상해 내가 따지고 들었고 남편도 마음이 상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자리를 피한 상황이었다. 나는 늘 그렇듯 싸운 이유와 별개로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그러다 너무 답답해서 직접 대화하는 건 못해도 이건 할 수 있지! 하며 무슨 생각인지 카톡으로 길게 내 마음과 하고 싶은 말들을 적어 보냈다. 남편이 진절머리 내는 카톡 편지를 적어 보낸 것이다. 그랬더니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지는게 아닌가! 내가 화났던 이유는 내가 원치 않는 '기다림'을 기약없이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한다'는 거였는데, 상대방이 받든 말든 하고 싶은 말을 던지고 나니 나는 더 이상 억울한 입장이 아니었다. 내가 놀랐던건 생각보다 남편이 그걸 확인하는지, 내가 원하는 반응을 하는지와 별개로 그저 '내가 하고픈 말을 했다' 라는 것 자체가 주는 힘이었다. 가벼워진 마음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집안일을 하고 있자니, 남편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와 (놀랍게도) 먼저 말을 걸었다. 항상 남편이 시간을 갖는 동안 나는 더 화가 나 있었는데 오히려 기분이 좋아보이니 어지간히 이상하고 궁금했나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내가 더 화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정확히 알게 되었고, 카톡을 보내는 방법 말고도 내가 이 상황을 기다려야만 하는 약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생각해냈다. 어딘가에 적나라하게 남편 욕을 적는 것도 나름 속이 시원했고, 가능하다면 나만의 공간에 들어가 노래를 듣거나 하는 것도 환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포인트는 초점을 남편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두는 것이었다. 자리를 피한 남편을 쳐다보고 있을 수록 화가 났는데, 화나고 억울한 나를 보니 어떻게든 풀어줘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생각해보면 사실 나를 버리고 간 것은 남편이 아니라 남편을 보러 간 내가 아니었을까. 버림받은 건 남편으로부터 이전에 나로부터가 아니었을까. 우리의 싸움은 서로 존댓말을 쓰기로 한 이후로 급격히 줄었지만 잊지 말아야겠다. 나를 챙기고 달래야 하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나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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