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이맹 Nov 17. 2022

졸지에 가을방학

아침에 일어나면서 인상을 쓰게 만드는 고통. 생리통, 숙취 그리고 치통.

생리통이나 숙취는 어느 정도 예상이라도 하고 잠드는데, 치통은 참 그렇지 못하다. 급성치수염에 걸려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어느 밤에 예고도 없이 불쾌하게 찾아와 지옥과도 같은 아침을 맞이하는 그 기분.


이번에도 왼쪽 하악이었다. 이상하고 굉장한 고통이었다. 정확히 일 년 전 한국에서도 느꼈던 그 몸서리치던 고통. 그때는 급성치수염 판정을 받고 왼쪽 하악 마지막 어금니 신경치료를 받았었다. 정확히 말하면 ‘재신경 치료’였다. 장작 5번에 걸쳐서 매번 치과에서 주는 인형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려가며 마취를 맞았던 기억, 입이 작은 편이라 치료하는 의사도 치료받는 나도 매번 힘들었던 기억, 어마어마하게 돈이 깨졌던 기억이 연이어 났다.


안되는데, 분명히 치료했던 이고, 그 앞에도 크라운도 그 참에 새로 교체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매복 사랑니가 치고 올라오는 것일까? 안되는데, 그 사랑니는 신경관을 지나가고 있을 수도 있어서 대학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왜지.


난 시름시름 앓았다. 오전 내내 잠만 잤다. 자고 일어나면 아픔이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픔은 지칠 줄 몰랐다. 결국 아스피린으로 버텼다. 좀 나아지는 듯했지만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아팠다. 괜찮은 건가 싶다가도 기분이 이상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학원 방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총 3주간의 방학이었는데, 그중 마지막 주에 그 사달이 난 것이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는 이 아픔도 가시겠지 싶었다.


아스피린은 3일 이상 복용하지 말라는 약사의 처방에 따라 딱 3일까지만 복용했다. 하지만 진짜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개강 3일 전,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숟가락을 입으러 가져가며 입을 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아픈 부위에 무언가 솟아나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러더니 왼쪽 귓불 아래를 중심으로 해서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턱을 조금만 움직여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신경관이 부은 걸까, 붓기는 더 심해져 갔다. 얼굴은 일그러졌고, 나는 씹을 수 없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응급으로 갈 수 있는 동네 치과를 찾다가, 한 곳을 찾았다. 이전에 크라운 교체 및 치료 견적을 문의했던 치과였다. ‘우리는 조금 덜 비쌉니다.’라고 써붙였던 이유는 알고 보니 의사들이 모두 외국인들이었기 때문. 이탈리아 아니면 스페인 의사들. 아픈 턱을 부여잡고 의사에게 입을 간신히 벌리며 그 속을 보여주었다. 의사는 나보다 불어를 못했다. 우리는 서로 수준 낮은 불어를 가지고 열심히도 이야기했다.


처음에 의사는 나의 1년 전 서울에서 찍었던 엑스레이를 보고는 아무래도 매복 사랑니가 문제인 것 같다고 했다. 육안상으로는 문제를 확인할 수 없다며. 내가 영 불안하여 사진을 간단히라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엑스레이를 찍어본 후 의사는 소견을 바꾸었다.

“어?! 여기 마지막 치아 뿌리 주변에 시꺼먼 거 보이죠? 이게 염증인데… 이 치아 때문인 거 같아요. 그 치아 크라운을 떼고 내가 한 번 봐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앞이 새하얘졌다. 1년 전에 재신경 치료를 한 치아가 또? 백만 원이나 주고 한 건데 또? 나는 일단 이전에 다니던 치과에도 연락을 해보고자 일단 약만 처방받아서 나왔다. 1000mg짜리 항생제와 스위스 가정집에 하나씩 구비되어 있는 평범한 진통제였다.


강력한 항생제를 먹으니 확실히 염증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부어올랐던 하악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씹어먹는 것은 불가능했다. 괜찮겠지, 싶어서 시도하면 너무 아파서 숟가락을 집어던졌다. 수프와 요거트, 계란국을 끓여 먹으며 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치과 치료비도 턱없이 비싸고, 말도 완벽히 안 통하는 곳에서 내 중요한 치아를 맡길 수 있을까? 역시 치과는 한국이 최고라는데… 역시 답은 하나인가. 한국행?

이참에 한국을 다녀올까, 몇 달째 미뤄둔 구멍 난 크라운도 교체할 겸, 간간히 아픈 치아들도 좀 손볼 겸. 가족들도 친구들도 보고. 한식도 왕창 먹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해결책을 어쩌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일까. 나는 사실 한국에서의 시간이 필요할만큼 지쳐있던 것일까. 마지막 학기를 미루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비자도 연장을 해주지 않을까, 사람이 아프다는데.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후련해졌다. 여전히 씹지는 못했지만 괜히 덜 아픈 것 같았다. 다음 날, 비행기를 예약했다. 3일 뒤 출국이었다. 학원 개강 날, 부랴부랴 소식을 알리고 짐을 대충 쌌다. 비행기에서도 뭘 제대로 못 먹을 텐데 그 장거리를 어떻게 버틴담, 특별식으로 이유식을 주문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비행기에서 와인 한 잔 못하는 것은 슬픈 축에도 끼지 못했다. 항생제가 너무 센 탓에 설사도 계속했다. 정말이지 이래저래 상태가 안 좋았다.


출국 당일.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날이 밝지도 않았을 때 제네바로 향했다. 비행은 최악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고, 잠들지도 못하는데 프랑스 단체 여행자들이 있어서 시끄럽기까지 했다. 인천 공항에서 집 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경북 상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코로나 이후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전으로 가서 이동해야 했다. 수월한 게 하나도 없었다.


대전버스터미널에 내려서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꽃집이 있었다. 힐끗거리며 본 꽃집 안에는 너무 예쁘게 활짝 핀 해바라기가 있었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꽃.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해바라기 꽃을 들고 기차에서 내렸다. 황간역으로 마중 나온 부모님을 보자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엄마를 와락 안았다. 다음에 엄마를 만나면 꼭 안아주리라 다짐했던 것을 생각보다 빨리 지키게 된 것이다. 엄마는 못 씹는 딸내미를 위하여 호박죽을 끓여오셨다. 나는 상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호박죽 냄새와 엄마의 사랑을 호로록 삼켰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부모님 댁, 홈 스위트 홈. 로잔에서 제네바, 제네바에서 파리, 파리에서 인천, 인천에서 대전, 대전에서 황간, 황간에서 상주까지. 배를 제외한 웬만한 교통수단을 골고루 타고 총 30시간이 걸려 집에 온 것이다.


부모님은 7년 전 (벌써 7년이라니…) 뜬금없이 연고도 없는 경북 상주에 감나무 밭을 사고 집을 지었다. 집 앞에는 백두대간 산책로가 있고, 마을은 30가구도 채 안 되어 조용하다. 우리 집은 마을의 꼭대기 터에 자리 잡고 있다. 테라스에서는 앞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아침이면 해가 눈부시게 스며든다.


아픈 턱을 부여잡고 도착한 한국은 가을이 한창이었다. 집에서 보는 가을 풍경은 금세 내 눈을 사로잡았다. 알록달록 예뻤고,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이가 아프단 이유와 매복 사랑니처럼 숨겨진 향수병으로 생각지도 않은 시기에 오게 된 한국. 그렇게 졸지에 맞이하게 된 (언제 끝날지 모르고 시작된) 가을방학.


그리워하던 한국에서

사랑하는 계절을

보고 싶던 부모님과 보내는 나의 가을방학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