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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Nov 20. 2022

나이 삼십 넘어 엄마 아빠랑 치과를 갔다.

이참에 치과를 옮기기로 했다.

사실, 치과를 다닌 경력이 나름 오래되는 것에 비해 꾸준히 한 치과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하도 오래전에 치료한 치아가 많다 보니, 어떤 이를 어디에서 한 건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래도 나를 스위스에서 한국으로 급귀국하게 한 말썽을 일으킨 이에 대한 기억은 보다 또렷했다. 불과 일 년 전 일이니, 의사와 나누었던 대화들도 어느 정도는 기억이 났다. 그래서 그 치과를 다시 가려고 했으나, 아빠에 의해 나의 계획이 바뀌었다.


“서울에서 치과 다니면 비싸기나 하지, 여기 상주에 아빠가 다니는 데 있어. 아주 양심적이고, 잘해! 그 의사 말만 들으면 돼.”

“아빠 거기서 CT도 찍을 수 있어?”

“그럼! 다 있어 여기도! 걱정 마.”

나는 강력한 항생제의 약발이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치료를 받고 싶었다. 아니 정확한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아빠가 이렇게나 자신 있게 추천하는데, 한번 가보지 싶었다.


치과 가는 길. 나는 아빠 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엄마도 함께였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 치과를 가본 적이 도대체 얼마만인 걸까? 성인이 된 이후로, 친구와 함께 치과를 방문한 적은 있어도 굳이 부모님과 시간을 맞춰 치과를 간 적은 없다. 그리고 앞으로는 부모님과 적어도 나 때문에 같이 치과를 갈 일은 다시없을 줄 알았다. 심각한 수술을 하지 않는 한, 치과에서 보호자가 동행하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그런데, 내 나이 삼십이 넘어서 부모님과 함께 치과를 가고 있는 것이다. 아픈 치아에 어떤 진단이 내려질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문득 엄마 아빠와 치과를 가고 있는 그 상황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가 아프다고 산 넘고 바다 건너온 딸을 싣고 당신의 단골 치과로 향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식들 걱정할까 말도 안 하고 어느덧 임플란트를 셀 수도 없이 많이 한 아빠가 믿고 데려가는 치과. 그 치과로 향하는 길에 나는 여전히 무서워 덜덜 떨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 잔잔하게 밀려왔다.


집에서 치과까지는 22km, 왕복 1시간이 걸린다. 내가 운전을 해서 다닐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운전을 못한다. 마지막 운전은 5년 전 탄자니아에서 오프로드를 (마음만은 신나게) 달렸을 때이다. 그보다 오래전 고작 하루 이틀뿐이었지만, 서울 시내를 달려본 적도 있다. 운전할 줄은 알아야 하는데,라고 생각은 많이 하는데 운전대 잡는 게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지 모르겠다. 운전면허증 갱신도 받았지만, 그저 신분증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치과를 오갈 때면 매번 아빠가 같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내 아픈 치아는 결국 사망 선고를 받았다. 엑스레이 상으로 염증이 비치는 것은 맞지만, 강력한 항생제를 며칠간 먹은 효과 덕분인지 스위스에서 찍었던 사진보다는 염증이 덜 해 보였다. 통증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재 재 신경치료를 권하지는 않았다. 원하더라도 대학병원에 가라고 했고, 성공률이 반도 채 안될 거라고 했다. 이미 발치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라,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련한 마음이 조금은 들었다. 임플란트고 뭐고,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니까 나는 발치를 하기도 마음먹었다.

 

구멍 난 크라운과, 가끔 말썽을 일으키는 치아에 관해서도 상담을 받았다. 사실 오래전 신경관 뿌리가 자라기도 전에 신경 치료해놓은 어금니가 몇 개 있어서 CT를 찍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CT는 찍을 수 없었다. 아빠 말과는 달리, 기계가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조금 더 진단을 정확히 내려봐야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새 나도 아빠의 자신감에 동요된 걸까. 나는 상주 시내의 아빠 단골 치과에서 싹 필요한 치료를 받기로 했다.


발치 예약을 잡고 돌아가는 길, 발치 첫 경험을 앞두고 있는 내게 엄마 아빠는 내게 연신 이야기했다.

“앓던 이 빠지면 얼마나 시원한데! 그거는 아프지도 않아. 씹는 것도 금방 적응할 거야.”

부모님은 발치 선배로서 내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기 바빴다. 아빠는 내심 내가 당신의 단골 치과를 다니게 되어 안심인 눈치였다.



치과를 상주에서 다니게 되면서 나는 부모님과 생각보다 더욱 오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매번 벌벌 떨며 치과 가는 길에서도,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는 대기실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동안 너무도 당연하게 혼자 해왔던 것들을 이러저러한 물리적인 이유로 부모님과 함께 하니, 어색한 것도 있었지만 사실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치과 가는 날에 맞춰 부모님은 시내에서 볼 일을 몰아서 보곤 했다. 동네에서 살 수 없는 것들을 산다 던가, 내과에 들러 당신들 혈압약을 받아온다던가, 장 서는 날에는 함께 장에 들른다거나 하면서. 자연스레 나도 부모님과 함께 다니게 되었다.


비록 아파서 생각지도 않게 귀국을 하게 된 것이지만, 덕분에 내게는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쌓여 갔다. 부모님과 같이 집을 나와서 같은 목적지에 갔다가 다시 같이 집에 들어가는 것.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함께 해내는 그 작은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문제적 치아를 발치한 날, 아프다고 낑낑대며 있는 내게 엄마는 순두부를 데쳐 주었다. 순두부에 끼얹어 먹는 엄마표 양념간장은 내가 어릴 때부터 순두부를 좋아한 이유이기도 하다. 순두부가 발치한 쪽으로 쓸려가지 않게 고개를 꺾고 열심히 삼키며 생각했다.

서울에 가지 않고, 상주에서 치과 다니기를 참 잘한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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