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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Nov 27. 2022

감 따는 날

어금니 발치를 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전날 저녁에 이어 아침도 순두부를 먹었다. 감을 따기로 한 날이라 든든히 먹어두면 좋았겠지만, 아직은 영 열심히 씹어 먹는 게 어색하기만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났고, 옆 동네에 사는 고모네도 감 따는 것을 도와주러 왔다.


고모와 고모부는 우리 가족이 수원에 살고 있을 때에도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그래서 예전부터 별일이 없어도 자주 만난다. 부모님의 귀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와 고모부도 근처로 이사를 왔다. 고모네는 부모님 집과 비슷한 모양새로 집을 짓고, 같은 모양의 아궁이, 닭장을 지었다. 우리 집 터는 감 밭이고, 고모네는 사과 밭을 샀다.


사실 ‘감’이라는 과일에 대해서는 미적지근한 온도를 품고 있었다. 유달리 기억나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선호하는 과일도 아니었다. 홍시는 먹을 때 질질 흘려서 그렇지 맛있지 하는 그 정도. 있으면 먹고, 없다고 굳이 찾아 먹지는 않던 과일. 그런데 부모님의 집터가 감밭이라니.


상주로 이사 간 첫 해에 부모님은 감말랭이를 시도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유명한 상주 둥시감이라도 다짜고짜 말랭이를 ‘잘’ 만들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몇 번의 시도도 있었고, 또 날씨 탓에 감이 잘 안 열린 해도 있었다. 곶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곶감은 선물용으로 감말랭이보다 인기가 많곤 했다. 집 앞 감나무가 사실 엄청나게 많은 것도 아니고, 그저 소일거리로 조금 만들고 지인들에게 팔고, 주변에 나눠주고, 우리 간식으로 먹고 하는 정도이다.


그런데 올 해에는 감이 참으로 많이 열렸다. 여기저기 감이 풍년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린 감을 따는 날, 나도 한몫 거들기로 했다. 사실 나는 감을 땄다고 하기보다는 떨어진 감을 주우러 다녔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손이 닿는 것은 나도 땄지만, 손이 닿지 않는 높이의 감들이 대다수였다. 엄마가 장대로 높이 달린 감을 따서 바닥에 내려놓으면 나는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열심히 줍는 것이다. 들고 다니는 바구니에 감이 쌓이면 콘티 박스(농산물 운반상자)에 부었다.


계속 쭈그렸다 일어났다, 허리를 숙였다 폈다 하는 일이 정말이지 굉장한 노동이었다. 날은 또 왜 이렇게 쨍한지 추울까 봐 입었던 히트텍은 중간에 벗어버려야 했다. 반복된 움직임에 금방 힘에 부친 나는 우는 소리를 했다.

“발치하고 나선 푹 쉬어야 한다는데…”

그러자 엄마는 이야기했다.

“너 들어가서 쉬어도 돼. 그렇게 우는 소리하면서 일부로 안 해도 돼.”

엄마의 대답을 듣고는 입을 삐죽거리며 군말 없이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구시렁대며) 다시 열심히 감을 주웠다. 사실 내 역할은 아빠가 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었다.


나와 엄마가 딴 감들, 그리고 고모와 고모부가 딴 감들이 콘티 박스에 차곡히 쌓였다. 그러면 아빠가 박스들을 한 곳으로 옮기곤 했다. 옮길 때는 바퀴가 세 개 달린 수레를 이용했는데, 우리 집 앞 밭 터가 비탈길이라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감은 또 왜 이렇게 무거운지 박스를 하나씩 싣고 내리는 것은 정말이지 큰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빈 콘티 박스들을 가져다주는 것까지 아빠의 몫이었다.


나는 그런 아빠의 다리도 허리도 걱정되었다. 안 그래도 언제부턴가 무릎이 아파 무릎 골관절염 증상을 완화시키는 캡슐을 매일같이 복용하고 있는 아빠였다. 딸들한테는 말도 안 해주면서 말이다. 나는 아빠가 ‘으이차!’ 하며 박스를 내리고 싣고 할 때마다 아빠가 고생하는 게 너무 속상했다.

“아빠! 조심해! 무릎도 안 좋으면서, 괜찮아?”

그러면 아빠는 대답한다.

“아빠 밥 많이 먹어서 괜찮아. 다 나았어.”

맨날 거짓말이다.


우리 다섯 사람은 늦은 점심을 먹기 전까지 내내 감을 땄다. 엄마는 감을 따다가도 금방 점심을 뚝딱 차려주었다. 점심 메뉴는 불고기였고, 어른들은 반주로 소주를 드셨다. 나도 소주가 먹고 싶었지만, 발치 후에는 금주를 해야 하니 참았다. 발치한 반대쪽으로 저작해야 하는데 그쪽에는 구멍 난 크라운이 있어서 고기를 먹는 것이 사실상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오이지무침을 넣고 고추장에 쓱쓱 밥을 비벼 먹었다. 고기와 술은 쳐다만 봤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 나는 밥상을 치우고 어른들은 다시 나가서 딴 감들을 선별했다. 고모부의 소개로 둥시감을 팔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말랭이나 곶감을 만들지 않으면, 대량으로 곶감을 만드는 상인들에게 팔거나 아니면 농협 공판장을 통해서 파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우리 집 감이 상당히 실하고 때깔도 좋고 하니, 아마도 콘티 박스 하나(20kg 정도)에 3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중간에 다녀간 동네 이웃에게서도 농협공판장에서 적어도 2만 5천 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팔 감들로 분류를 마친 후 드디어 하루 일과가 끝났다. 내일이든 언제든 곧 감을 팔기만 하면 그래도 오늘의 이 수고로움이 빛을 보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고모부에게 안 좋은 소식의 연락을 받았다. 감을 사기로 한 구매자가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감이 올해 열려도 너무 많이 열려서 감 가격이 떨어졌다며, 한 박스에 고작 1만 3천 원을 준다고 한단다. 같은 날 공판장에서 그나마 상태 괜찮은데 1만 원에 거래되었다는 말과 함께.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던 나도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왜 갑자기 말을 바꾼데?”


나는 화가 났지만 아빠는 침착했다. 엄마는 어찌해야 좋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인건비도 안 나오는 금액을 받고 감을 판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 하지만 아빠는 감이 너무 많고, 우리는 감 깎는 기계도 없어서 저 많은 감을 다 처리할 수가 없으니 그 가격에라도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너무 분했다. 온종일 고생한 부모님의 노고가 헛되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몇 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구매자가 만원에도 가져가지 않는다고. 고모부가 아무리 우리 집 감이 상태가 좋다고 했지만, 듣지도 않는가 보다. 금방 감을 가져갈 거라고 해서 무리해서 오늘 딴 거였다. 여러 모로 기분이 나빴지만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엄마가 말했다.

“우리 그냥 감 깎자. 앉아서 슬슬 깎지 뭐, 그래서 감말랭이도 하고 곶감도 오랜만에 해보자.”

부모님이 감말랭이나 곶감을 만들 때 내가 옆에서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엄마를 거들었다.

“그래, 내가 있는 동안 다 만들어. 나도 같이 할게!”


아빠도 참으로 속상하고 화가 나는 눈치였지만, 이내 마음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인건비조차 나오지 않는 금액에 감을 팔아넘기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곧바로 언니에게 이러한 상황을 카톡으로 전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언니 또한 자신 넘치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그래 곶감은 주변에 선물용으로 찾는 사람 많으니까, 언니가 다 팔아준다고 해!”

참으로 든든했다.


그때 나는 그 많은 감을 깎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노동인지 감히 상상도 못 했다. 다가올 ‘감 깎는 날들’이 어떠할지 걱정하는 것은 그 전날 밤쯤에 하기로 했다. 미리부터 겁을 먹는다고 감이 제 발로 곶감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감을 따느라, 아니 주우러 다니느라 고생한 내 두 다리와 허리에 꿀 같은 휴식을 선사하며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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