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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Nov 01. 2020

[계절이 변할 때]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높고 온도가 적당해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가을은 그리 길지 않다. 아침저녁으로는 너무 춥다. 구멍 송송 뚫린 여름 신발을 신고 나갔다 왔더니 발가락이 시렸다. 이맘때 즈음 엄마랑 나는 날을 잡고 신발장과 옷장을 정리한다. 신발장 맨 위에 있는 상자들 속 겨울 신발을 꺼내고, 신발장에 널브러져 있는 여름 샌들을 넣는다. 샌들의 가죽이 서로 엉겨 붙지 않게 습자지를 한 장씩 끼우고, 이제 더 못 신겠다 싶은 신발 두어 켤레는 쓰레기통에 넣는다.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이 시간이 재밌다. 엄마랑 함께 앉아 같은 작업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즐거워 계절이 바뀔 때면 이 날이 기다려진다.


신발 정리를 하다 몇 해전에 한참 잘 신고 다녔던 추억의 신발을 발견했다. 엄마는 잘 신고 다니더니 요즘은 왜 안 신었냐고 안 신을 거면 버릴까? 하고 물어보셨다. 결혼식 갈 때 신을 구두가 없어 구매했었고 색이 마음에 들어 평소에도 자주 신고 다녔던 신발이다. 그러다 갑자기 싫증이 나서 한 3년 정도 안 신고 상자 안에만 넣어두었다. 유행이 지났다기엔 다시 보니 괜찮아 보여 올 겨울에 다시 신고 다니려고 상자 밖으로 꺼내 두었다. 처음 살 땐 이뻐 보였고, 3년 전엔 안 이뻐 보였는데 이제 보니 다시 이뻐 보인다. 그 구두에 얽힌 사연이나 마음이 변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변덕이다. 그땐 그랬고, 지금은 아니다.


올해에는 한 번도 신지 않은 여름 신발들이 많았다. 코로나 때문에 많이 놀러 다니지 못해서 그렇다. 여름휴가 갈 때 입으려고 새로 산 원피스도 개시하지 못했다. 매년 여름이 되면 외갓집 식구들이 모두 전주 셋째 이모 댁으로 휴가를 가는데 올해에는 그것도 하지 못했고, 우리 4 식구만 여행 다녀오기로 했던 약속도 아직 지키지 못했다. 이것도 코로나 때문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코로나와 별개로 해가 지날수록 가족 여행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어릴 땐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가는 네 식구 가족 여행이 한 해의 메인이벤트였는데 이제는 일 년에 1번도 지키기가 힘들다. 나와 동생은 훌쩍 커 각자의 사회가 커졌고 엄마는 더 바빠진 것 같다. 그래도 아빠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제일 놀러 가기 좋아하는 귀여운 골목대장이라 다행이다. 어서 코로나가 지나가 내년에는 우리 네 식구 해외여행을 갈 수 있길 바라보고, 한 번도 입지 못한 여름 원피스를 입을 때가 돌아오면 좀 더 여유롭게 가족들의 시간을 충분히 갖자고 다짐도 한다. 계절이 바뀌어 옷장 정리를 하면서 지난 계절의 시간들도 함께 정리해본다. 작년과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생겨났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엄마 몸 밖으로 나온 후 벌써 30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정말 30번의 여름이 있었나?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의 여름은 55번이 지났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나갔느냐며 진한 한숨을 내뱉는 엄마를 보면서 어떤 말을 건네어야 좋을까 고민한다. 시간의 흐름에 함께 놀라자는 말을 전하고 싶다. 시간이 흘러감에 대한 놀라움과 아쉬움에 함께 공감하자고, 아직 어리지만 이제 엄마의 마음을 전보다는 더 공감할 수 있는 딸이 되었음을 알리고 싶은데 어떤 말로 이 마음이 표현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엄마는 아직도 이뻐서 괜찮아하고 만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변한다. 계절이 변하며 생각도 변한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들도 자꾸 변한다. 변화에 대처하는 태도도 달라지고 엄마와 딸 사이의 간격도 달라진다. 서로 바라보는 자리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자리로 옮겨 앉고 싶다. 엄마 옆에 앉아 엄마가 내게 기댈 수 있을 만큼 더 가까워지고 싶다. 계절이 변하면서 많은 것이 바뀐다. 엄마와 나 사이의 간격이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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