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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Nov 01. 2020

[과식하지 않게 된다는 것]

 요 근래 내가 변했구나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내 위장의 크기와 소화 능력치가 얼만큼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랬다. 그 전에도 적정선 이상 먹으면 배가 불렀으니까 내 뱃속 그릇의 크기를 몰랐던 건 아닌데 이제는 나의 용량을 고려할 줄 알게 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배불러도 맛있으면 오버해서 더 먹고 또 먹고 배가 찢어질 듯 아플 때까지 미련하게 먹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많이 먹으면 소화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고 나는 또 소화가 다 되길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버릴 거고 그럼 아침까지 속이 더부룩하고 아침에 배가 아파 출근길에 곤욕을 치르게 될 것까지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내일 아침까지! 더 멀리까지! 볼 수 있게 되었고 지금 당장 입 안의 행복과 미래의 불편함을 저울질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기특함을 느낀다. 당장의 행복을 조금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면에서 대견하다. 


 행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일을 저지를 때에 무리해서 스케줄을 잡지 않을 수 않게 되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우선순위를 매겨 순서에 맞춰 일을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몇 달 전에도 지키지 못할 계획들을 빽빽하게 세워놓고 지키지 못해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를 반복했는데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이전에 나의 소화력을 체크하게 된 건 정말 큰 성장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과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음식이든 일이든 나의 소화력을 고려해서 적당한 용량을 취하고 그것을 무리 없이 소화시키고 소화를 마쳤다는 뿌듯함과 나의 절제력에 대해 스스로 칭찬하는 것은 참 쿨 해 보인다. 그 이후 또 다른 적정량의 인풋을 넣어주고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이 내 상상 속 이상적인 어른이다. 


 막연했던 이상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내가 원하는 내 얼굴의 눈코 입이 하나씩 채워지는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데?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거야? 자문을 반복해도 답이 지어지지 않던 질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쉬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과식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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