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의 가능성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회색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 회색이 품고 있는 넓디넓은 가능성의 공간인지도 모른다.
처음 팔레트를 갖게 되던 무렵의 기억이 떠오른다. 플라스틱 팔레트가 아니라 겉은 까만색이고 속은 흰색인 철제 팔레트가 내 것이 되던 날. 미술학원에서였다. 물감을 그때그때 풀어서 쓰는 게 아니라 칸칸마다 있는 힘껏 물감을 짜서 굳힌다. 색을 사용할 때 한쪽에 놓인 물통에서 물을 살짝 찍어 색을 녹이고 다른 색도 조심히 녹여서 색을 섞는다. 이 모든 과정이 마법 같았다. 내가 만들어 낸 색은 선명한 노랑이었다가 초록이 섞이고 노랑도 초록도 아닌 뭐라 부를 수 없는 색이 되어 울상을 지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색을 도화지 위에 펼쳐 놓으면 다른 색들과 어우러져 제법 그럴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색. 팔레트 위에 굳어 있는 이름 있는 색들 사이에서 만들어 낸 수많은 색들. 섞어서 만들어진 색 중에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색은 흰색과 검은색 사이의 회색이었다. 짙은 회색 옅은 회색 어쨌든 그건 회색이었다. 이름도 예쁘지 않은 회색.
내가 회색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그 후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누군가 나를 특정 짓는 것이 싫었다.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지거나 내가 속한 한 집단의 특성으로 내가 규정지어지는 것도 싫었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누군가가 너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에 거부감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내가 아닌 타인이란 거울을 통해 보는 나는 전혀 다른 색, 다른 빛깔의 누군가처럼 여겨졌다.
나의 한 면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싫었으면서 나 역시 타인을 규정하고 판단했다. 겉으로 말할 때도 있었고 말하지 않고 내 안의 서랍에 이리저리 분류하여 밀어 넣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 그 서랍에 맞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면 당혹스러웠다. 어디에도 넣을 수 없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역시 바람에 기울어진 표지판을 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여행자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무슨 색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대부분 회색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어느 지대에 놓여 있었다. 내가 회색이라는 걸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니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흔들리는 나를 인정하니 다른 사람의 흔들림도 보이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 서랍을 치워버렸다. 회색도 같은 회색이 아니라는 것, 저마다의 회색이 있다는 것. 내면의 다양한 회색들을 마주할 때마다 일단 그것을 들여다보려 할 것이다.
히르슈스프롱 컬렉션의 디지털 가이드 단말기로 본 하메르스회이의 팔레트는, 이 세상 어느 화가의 것과도 달랐다. 오직 흰색과 검정 사이 회색으로만 채워진 팔레트. 미묘하고도 모호하게 존재하는 수많은 층위의 농담들. 그 부족 없이 풍요로운 세계.
하메르스회이의 팔레트를 보며 회색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찬성 아니면 반대라고, 내 편 아니면 적이라고, 성공 아니면 실패라고, 1등 아니면 루저라고 단정 지으며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는 폭력이 횡행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회색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 회색이 품고 있는 넓디넓은 가능성의 공간 인지도 모른다.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최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