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의 인공지능 로봇 2, 영화 <채피>
“내가 며칠 있다 죽는다는 게 맞아? 배터리가 떨어져 죽는 게 맞아? 당신은 내 제작자잖아. 왜 날 죽도록 만들어 놓았어? 난 살고 싶어 난 죽기 싫어.” - 영화 <채피>(Chappie) 중에서
인간은 함께 살며 돌보는 강아지와 고양이는 물론 도마뱀이나 작은 벌레 같은 생명체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느낍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로 대우하기에 공감을 경험하며 반응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느낍니다. 하지만 로봇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봇은 생물체가 아니라 무생물이며 인간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인간은 로봇을 인간의 생명을 지키고 인간 삶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여깁니다. 그래서 고장 나거나 사용할 수 없는 로봇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필요가 없으면 언제든지 폐기하고 다시 만들면 되는 그런 물건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처럼 손과 발 또는 얼굴을 가진 로봇은 기계를 다루듯이 쉽게 생각하기에는 머뭇거려집니다. 또 외형이 인간과 닮지 않아도 자신과 대화를 하며 간단하지만 의사소통을 했던 장치를 다둘 때도 조심해서 행동하게 됩니다.
인간을 닮은 로봇
지금까지 로봇공학은 인간의 외모를 닮은 로봇을 만들거나 인간의 신체 일부를 기계장치로 대체하는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인공적인 장치가 부여되는 정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용어가 사용됩니다. (이종호, 『로봇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서울: 북카라반, 2016), 6-7.)
먼저 ‘사이보그’는 사이버네틱 오거니즘(cybernetic organism)의 약자로 인공장기를 단 사람을 뜻합니다. 1950년대 NASA 과학자들이 인간을 우주나 심해 등 특수한 환경에 투입할 때 인공장기를 달아서 초인적인 능력을 내게 할 수 있는지 연구하면서 만든 말입니다.
또 비슷하게 사용하는 용어인 ‘휴머노이드’(humanoid)는 겉모양이 사람과 닮았다는 뜻으로 로봇이 아니어도 어떤 물건이든 머리와 몸통, 두 팔과 두 다리가 있어 인간과 유사하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android)는 전통적인 기계 로봇이 아닌 피부와 장기 조직은 물론 두뇌까지 진짜 사람과 유사한 인조인간을 가리킵니다.
결국 가장 발전적인 형태의 로봇은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 로봇입니다. 외형만 인간 같은 로봇이 아니라, 주변 사물을 인지하고 다양한 과제를 해결하는 인지능력을 가진 로봇입니다.
그런데 인지능력만으로 인간을 닮았다고 말하기는 부족합니다. 관건은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는 로봇이 로봇공학에서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인공지능 로봇의 미래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과 닮았다는 것을 넘어 인간과 같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는 1955년 다트머스 대학에서 두 달 동안 존 매카시(John McCarthy),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 등 10여명이 모인 워크샵에서 존 매카시가 컴퓨터에 인간의 지적 활동을 가르치는 연구 계획서를 작성하며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마빈 민스키는 “사람이 수행했을 때 지능이 필요한 일을 기계에 수행시키고자 하는 학문과 기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는 인간 지능의 원리와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과학적 연구, 그리고 인간의 지능적 정보처리능력을 프로그램화해 컴퓨터가 지능적으로 동작할 수 있도록 하는 공학적 연구로 실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 과학을 중심으로 철학·언어학·생리학·윤리학 등 인간에 대한 여러 학문 영역을 포괄합니다.
사실 인공지능을 설계하고 만들어 작동시키는 것, 패턴을 익히는데 필요한 데이터를 제공하고 알고리즘을 조작하는 것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보다 나은 결정을 했다하더라도 그것 또한 완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한계와 불완전성이 인공지능에도 그대로 반영될 것이니까요.
반면 초지능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한다면, 그 순간은 현생 인류가 아닌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며 느낀 감정을 표현하며 공유하는 것은 로봇에게 구현시키기 어려운 자유의지가 반영된 신비한 차원입니다.
이것은 초지능으로 가는 앞선 단계일 텐데,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로봇이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며 심지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현생 일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초월하는 새로운 존재인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등장을 예견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능력을 압도하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로봇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일정한 법적 지위를 취득하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하며 법적 책임도 부담하는 존재가 되겠지요. 이전처럼 인간과 로봇의 관계에서 인간은 지배의 주체로 반면에 로봇은 객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인간과 상호공존 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 때는 인간 삶이 기계의 선택과 판단에 좌우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인공지능의 선택이 정말 인간을 위한 결정인지, 아니면 기계를 위한 결정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로봇 이야기
그런데 만약 인간과 같이 느끼고 공감하며 인간과 소통하는 로봇이 죽는다면 어떤 마음이 들고 또 인간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요?
그리고 그런 로봇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인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지 않으려는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채피>(Chappie, 미국/2015)의 경찰 로봇 ‘채피’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는 매일 300여 건의 범죄가 폭주하면서 인간 경찰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로봇 경찰 ‘스카우트’ 군단으로 경찰업무를 돕게 합니다.
특히 총격전이 벌어지는 범죄현장에서 이 로봇들은 인간들 앞에 서서 인간을 보호하며 임무를 수행합니다.
경찰 로봇 스카우트의 제작자인 디온은 경찰청에서 로봇의 추가 제작을 요청하면서 회사에서의 입지가 든든합니다. 하지만 그의 최대 관심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같이 생각하고 문화적 활동이 가능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랜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면서 회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기를 앞둔 ‘스카우트 22’에 인공지능을 설정해 스스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로봇 ‘채피’가 탄생합니다.
채피는 갓 태어난 아기와 같았습니다. 지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낯선 것을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합니다. 하지만 배우려는 열정이 높고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정보를 취득해갑니다.
곧 사람과의 대화는 물론, 그림을 그리는 등 인간의 모습을 갖춘 로봇으로 점차 성장해갑니다.
그런데 자신을 제작한 디온이 아닌 갱스터 아빠 닌자와 엄마 요린다와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언어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그리고 범죄활동에 가담하게 됩니다.
채피는 아직 판단능력이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고, 고장 난 로봇에 인공지능을 심어 만들었기에 배터리가 다하면 멈추게 될 제한된 수명을 가진 로봇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죽음 앞에서 불안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인간이 처한 실존과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필요와 욕망 앞에서 바른 판단이 흔들리고 목숨을 지키고 구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도 보입니다.
채피는 배터리가 다하기 전에 다른 로봇으로 교체되어 죽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것을 위해 가능한 방법을 모색합니다. 갱스터와 같이 범죄 현장에 참여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습니다. 인간처럼 몸으로 존재하기를 원하며 죽지 않으려는 로봇, 그것이 바로 채피입니다.
같은 회사의 또 다른 로봇 제작자인 빈센트는 디온의 라이벌로 인간의 뇌와 로봇이 연결되어 조정하는 로봇,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전투로봇 ‘무스’를 만듭니다.
영화 마지막에서 채피의 제작자 디온과 엄마 요린다가 무스에 의해 죽습니다.
그러나 채피는 디온의 의식을 인공지능으로 로봇에 이식해 디온을 로봇으로 살립니다. 또 이미 장례까지 마친 엄마 요린다의 의식을 저장한 USB를 활용해 임의로 공장의 기계를 작동시켜 로봇 요린다를 만듭니다.
인공지능을 통해 죽은 사람이 로봇으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며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작동 중단'이나 '폐기'와는 다른 인간 죽음
사실 죽는다는 것은 인간과 로봇, 인간과 똑같은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입니다. 어쩌면 절대적인 기준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로봇이 점점 그 영역을 넓히며 인간을 압도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로봇에게 죽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로봇에 적용하는 ‘작동 중단’이나 ‘폐기’를 인간이 말하는 죽음이 담은 의미와 동일시 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단지 행동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를 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의 사건은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죽음을 인식하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삶의 목적이나 이유 또는 열정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만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보고 거리를 걷는 것과 같이 너무도 소소한 삶의 즐거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으로 이전의 삶과의 단절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추억이라는 방식으로 기억 속에 오래도록 관계를 맺습니다. 인간은 죽는다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편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기억과 살았을 때의 삶의 자취로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 면에서 죽음이야말로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영화 <채피>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 예를 들어, 로봇을 제작하는 사람의 윤리적인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인간의 의식을 인공지능으로 이전하는 것이 가능할지 그리고 의식만 이전하면 정말 그 사람이 될지에 대해서도 여러 이견들이 있을 수 있는 논쟁적인 주제도 등장합니다.
인간과 비교하자면 어린아이 수준의 발달단계에 있는 로봇 채피는 죽는 것을 ‘잠을 자는 것’,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죽는다는 것에 대해 알고는 두려워하며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죽지 않을 몸을 얻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이런 로봇이 등장한다면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차이는 무엇이 될지, 로봇과 구별되는 인간의 인간됨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질문이 많아집니다.
아직까지 인간처럼 자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인지활동을 하는 로봇은 등장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언제 등장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로봇이 등장한다면, 인간과 상호공존하는 대상으로서의 로봇이라면 지금처럼 죽음을 인지할 수 없는 로봇과는 다른 차원에서 죽음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