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그 중에서도 엄마가 말기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의 마음은 어떨까요? 게다가 아빠는 한 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이 오로지 엄마와 살아왔다면 말이지요?
소설 『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김이윤, 창비/2012)의 주인공인 고등학생 김여여는 사진작가인 엄마와 단둘이 사는데, 어느 날 엄마가 말기 암 판정을 받습니다.
엄마는 요양을 위해 파주에 집을 마련하고 잠시 머물다 오곤 했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김여여에게는 같은 학교 선배 시리우스에 대한 호감, 단짝 친구 세미와의 우정, 시험과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 등 일상의 학교생활이 이어집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김여여는 병세가 깊어진 엄마와 여행을 떠납니다.
삶을 잘 몰라도 죽음에 대해 묻게 되는 김여여는 인간 내면의 불안과 슬픔에 맞닿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죽음을 앞둔 상황 속에서도 내내 딸에게 안정감과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느 엄마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가까워진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누구나처럼 ‘나름 착하게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더욱이 ‘지켜 줘야 할 어린 딸도 있는데’ 죽어야 한다는 것에 억울해합니다.
그런 엄마와 헤어질 준비를 하는 김여여는 두려움 앞에서도 삶을 지켜나가야 할 오늘을 사는 여러분입니다.
김여여가 외발자전거를 익히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하는 말은 여전히 삶은 소중하고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세게 넘어져도 나를, 나의 삶을 놓지 않을 거야.”
미지생 언지사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
이 구절은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에 나옵니다. 공자의 제자 계로가 스승에게 죽음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놓은 공자의 대답이에요.
공자의 알듯 말 듯 한 이 말은 먼저 삶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로 또는 죽음은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림설명: 구영, <공자의 초상화>, 1494-1552년경) ‘죽음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해집니다.
사실 공자의 말처럼 죽음에 대한 것은 고사하고,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제대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정신없이 살다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국 왜 사는지를 묻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서 공부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청소년에게 삶의 이유는 자주 해보지 못한 질문이며 동시에 명쾌하게 대답하기 어려운 인생 과제입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물음은 더욱 낯설고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밖에요.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누군가의 슬픈 사연이나 오랜 세월 후 나이 들어 경험하게 되는 막연한 일 정도로나 여겨지겠지요. 어쩌면 죽음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산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싶습니다.
공자(孔子, BC 551-BC 479년)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한 시기를 살며 도덕성이 회복된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인(仁, 어질 인)으로 모아지는데, 사람을 사랑함으로 사람 사이의 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사회를 예(禮, 례 예)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어요.
그런 세상에서라면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에서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 夕死可矣)”고 했습니다.
공자의 관심은 사회의 근간이 되는 일상에서의 효와 공경에 있었고, 죽음을 논할 때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행하는 예를 통한 효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예를 행함에 있어서는 매사에 중용(中庸, 가운데 중/ 쓸 용)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어른이 죽으면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또는 도를 넘게 애도하는 것을 금했어요.
이처럼 삶의 가치를 실현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을 죽음으로 보았기에 죽음은 삶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자가 본 죽음은 ‘생로병사(生老病死, 날 생/ 늙은이 노/ 병 병/ 죽을 사)’, 사람이 겪게 되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삶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사실 죽음의 순간은 짧고 삶의 시간은 길어서 사람들의 관심이 적고 또 평소에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말하면 “재수 없다”라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지요.
하지만 누구라도 분명히 겪게 될 삶의 한 순간이 죽음이므로 죽음이 무엇인지 배워야 하고 필요한 것을 준비함으로 잘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죽음이라는 열쇠로 삶의 문을 열어보면 특별한 것이 보입니다. 어려운 삶의 풀리지 않던 문제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삶을 잘 모른다고 해도 죽음이 무엇인지 물어볼 이유는 충분하겠지요.
의사의 사망선고
“2019년 3월 26일 14시 29분, 김은영 님 사망하셨습니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1> 1회에서 소아과 의사 안정원이 3년이 넘도록 돌보던 어린 환자의 사망을 선고하는 장면입니다. 이후 자신감을 읽고 절망적인 마음에 의사 생활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000님, 00시 00분에 사망하셨습니다”라는 형식의 문장을 ‘사망선고(death pronouncement)’라고 합니다. 의학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듣는 말로 의사가 어떤 사람이 사망했다는 공식적인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해야 하는 순간에 의사는 많은 경우 엄청난 심적인 부담감을 느낀다고 해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괴로움에 선뜻 입을 떼지 못해 시간을 끌거나, 작은 소리로 대충 말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망을 선고해야 하는 순간의 무거운 마음은 의사가 되어 처음 수술을 집도할 때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SBS <백년손님>(158회 방송) 의사는 사망선고를 통해 환자가 죽었음을 공식화하기에 앞서서 병실이나 응급실, 수술실에서 다음 몇 가지를 확인합니다.
먼저 뇌의 기능정지 확인을 위해 환자의 눈꺼풀을 젖히고 불빛을 비춰 동공 반사가 이루어지는지 살핍니다.
이어서 손가락을 경동맥에 대고 심장박동이 있는지 심장 기능정지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호흡이 이루어지는지 폐의 기능정지를 판단합니다.
이렇게 뇌, 심장, 폐의 기능이 모두 정지한 것이 확실하면 시간을 확인한 후에 사망시간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림으로 사망선고를 합니다.
메모) 사망이란 / 사망의 정의에 있어 형법과 민법에서는 공식적으로 ‘심폐사(死)’를 따릅니다. 심폐사는 심장과 폐의 기능이 정지한 상태를 말하는데, 의료현장에서는 여기에 뇌를 포함해 세 가지 장기가 기능을 완전히 잃어서 회복할 기미가 없을 때를 사망으로 봅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심장과 폐의 기능을 대신해주는 생명유지 장치가 등장하면서 뇌까지 기능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다시 살려낼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심장과 폐는 기능 하지만 뇌만 기능을 잃은 경우, 일반 사망선고가 아니라 뇌사 선고를 받게 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으로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림설명: 중환자실에서 코로나19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들) 한꺼번에 사망자가 폭증하면서 중환자실은 물론이고, 시신을 둘 영안실까지 부족해서 어느 나라에서는 임시로 냉동트럭에 시신을 보관한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넓은 평지에 끝도 없이 늘어선 시신을 묻고 세운 십자가를 보게 되는 끔찍한 경험도 했습니다.
우리 중에는 가족을 비롯해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 또는 친구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기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절박한 상황에도 무겁고 답답한 방호복을 입고 밀폐된 의료현장에서 헌신을 다하는 의사와 간호사의 모습에서 새삼 무한한 신뢰와 함께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의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죽는 사람이 여전히 있으니 안타깝게도 의사의 사망선고는 계속되겠지요.
이 사망선고는 오로지 의사의 몫입니다. 119 응급구조사나 간호사 등 다른 의료진은 사망선고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고 현장에서 환자의 심장이 정지한 것이 명확해 보여도 증상만 기록하고 사망선고는 병원 도착 이후 의사가 내립니다. 또한 비행기 사고 등으로 장기간 실종되는 경우에 사망이 확실시되더라도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통해 사망신고를 접수하기 전까지는 계속 실종 상태로 남게 됩니다.
누구나 만나게 될 죽음
의사가 사망선고를 내리는 일에 부담을 느끼듯이, 누군가에게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말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우선은 피하고 싶을 거예요.
게다가 상대방이 그 말을 부정하거나 화를 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난감해서 누구라도 다른 사람이 내 대신 그 역할을 해주길 바라겠지요.
“여러분이 말기 암 상태가 된다면, 누가 말해 주기를 바라십니까?”라고 서울대 의대가 여론조사기관 월드리서치와 함께 40세 이상 한국인 500명에게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결과로 ‘의료진이 직접 말해 줘야 한다’가 79.2%,
‘가족이 대신 듣고 말해 줘야 한다’가 15.8%로 나왔습니다.
또 “가족이 말기 암 상태가 된다면, 누가 말해 주길 바라십니까?”라는 질문에도 ‘의료진이 직접 말해 줘야 한다’가 73.8%,
‘가족이 대신 듣고 말해 줘야 한다’가 22.5%였습니다.
이처럼 사망선고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의사가 맡게 됩니다. 환자이든 환자를 돌보는 가족이든 검사를 마쳤을 때의 결과나 진료를 실시하면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의 상태가 죽음에 이를 만큼 심각한 상태라면 더욱 의사로부터 정확한 대답을 듣기 원하겠지요.
그런데 이때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달라고 환자나 가족이 요구하는 상황이라면, 의시가 지금으로써는 어떤 조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때로 환자가 충격을 받을까 봐 가족이 의사에게 환자에게는 지금 어떤 상태인지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러다 말기 암 환자가 말기인 줄도 모른 채 앓다가 죽기도 합니다.
이처럼 누구라도 죽음을 생각하거나, 죽음에 대해서 선 듯 말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죽음에는 예외인 사람이 없고 누구라도 이런 절박한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 평소 죽음에 대해 알아두어야 합니다.
아는 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불안해하기보다 담담히 받아들이며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워 보이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실제로는 많은 사람의 관심사라는 것을 아세요?
미국 아이비리그에 유명한 강의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로 하버드대학교 탈 벤 샤하르(Tal Ben-Shahar) 교수의 강의이고, 또 하나는 ‘정의란 무엇인가’로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의 강의입니다.
그리고 예일대학교 교수인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의 강연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꼽힙니다.
(그림설명: 예일대학교에서 강의 중인 셸리 케이건 교수)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죽음이라는 주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건데, 그는 자신의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에서 죽음의 특징을 ‘죽음의 필연성’, ‘죽음의 가변성’, ‘죽음의 예측 불가능성’, ‘죽음의 편재성’으로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필연적인 것이며 누구도 그 사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영원히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에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죽음의 필연성(inevitability)’입니다.
또 얼마나 살지 모르는 ‘죽음의 가변성(variability)’에 어떤 사람은 100살까지 장수를 누리지만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죽음은 분명 필연적인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얼마의 시간이 더 남아 있는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죽음의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ility)’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 일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하고 장담하던 일이 무기력하게 끝나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편재성(ubiquitous)’ 속에 삽니다. 가장 건강하고 안전하다고 느낄 때에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순식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며 우리 삶에 만연해 있습니다.
메모) 생사학(죽음학) 이란 / 생사학 또는 죽음학(Thanatology)은 1908년 노벨 생물화학상 공동 수상자 가운데 한 사람인 러시아 생물학자 메치니코프(Elie Metchnikoff)가 1903년에 출간한 『인간의 본성』에 ‘Thanatology’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생사학은 죽음 교육을 포함하는데, 서양에서 죽음 교육은 1950년대 중반 죽음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파이펠(Herman Feifel)이 1959년 『죽음의 의미』를 출간하면서 반향을 일으켰고, 1960년대 들어 여러 학자들이 고등교육기관에 ‘죽음과 죽어감’ 관련 교과목을 개설하면서 정규 과정으로 들어왔습니다.
한국에서 죽음 교육은 1973년 김상태 교수가 덕성여대에 정규과정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그리고 1991년부터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등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강연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앞으로는 인공지능 로봇이 환자나 환자의 가족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부담을 대신 맡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IBM의 인공지능 왓슨(Watson)은 의료영역에서 의료기관과 제휴해 수많은 의학적 사례와 데이터를 학습하고, 환자의 전자 의무기록과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해 발병 원인을 찾아내 환자 개개인에 대한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의사가 심각한 진단 결과를 알려주거나 사망선고를 해야 하는 순간에 인공지능 로봇이 상대방의 혈압, 뇌 활동, 그 밖의 수많은 생체 데이터를 분석해 기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또 지금까지 접한 고객들의 통계자료를 근거해서 적절한 어조로 대신 사실을 전달한다면 의사는 심적인 부담을 많이 덜 수 있겠지요.
죽음 앞에서, 나는
의사로부터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될 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죽음의 특징이 분명함에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오랫동안 병을 안고 살던 사람이든, 갑작스럽게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사람이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그림설명과 출처: 죽음과 죽어감의 주기, ⒸU3173699/Wikimedia Commons) 이에 대해 생사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 1926-2004년)는 임종을 앞둔 여러 환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누구나 겪게 되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의 저서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에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첫째 단계 ‘부정과 고립’, 둘째 단계 ‘분노’, 셋째 단계 ‘협상’, 넷째 단계 ‘우울’, 다섯째 단계 ‘수용’입니다.
그녀는 이러한 다섯 단계의 과정을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겪는 것은 아니며 순차적으로 또는 겹쳐서 겪기도 한다면서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이때 각 단계에서 모든 환자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첫째 단계는 ‘부정과 고립’입니다. 죽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우선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에 사실을 부정합니다. 모두 다 그대로인데 자신만 사라질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부정하거나, 주변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있으려고 합니다.
둘째 단계는 ‘분노’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사실로 인해 화를 냅니다.
분노의 이면에는 믿고 있던 신에게 속았다는 느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는 주변의 가족이나 의료진에게 돌아가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셋째 단계는 ‘협상’입니다. 협상이라는 것은 죽음을 미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든지, 지난 인생에 대한 후회 속에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이나 애원의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넷째 단계는 ‘우울’입니다. 이제 사랑하는 모든 것, 모든 이들을 잃어야 한다는 것으로 인해 우울을 경험합니다. 희망을 상실하고 이제 내게 더 이상의 미래가 없음을 직감하면서 우울과 체념의 단계로 빠지게 됩니다.
이때 슬퍼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요. 오히려 환자 곁에서 끊임없이 슬픔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삶의 마지막을 훨씬 더 편안하게 하도록 돕는다고 합니다.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수용’입니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날 때가 있듯이 이제 삶을 마무리할 때가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삶의 마지막 과정을 평안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삶의 마지막을 제대로 가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해, 일본 학자 알폰스 데켄 교수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서 이후의 단계로 ‘새로운 희망과 회복의 단계’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을 상담하면서 관찰해 보니 죽음의 과정 가운데 다섯 번째 단계를 넘어서 그다음의 단계를 밟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즉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단지 수동적으로 용납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희망 속에서 적극적으로 죽음을 고대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과정은 죽음을 앞둔 환자 본인이 겪는 과정만 아니라, 환자의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설명하는 내용이기도 하지요.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일이든 타인의 일이든 시간이 걸리고 다양한 모습의 여정을 거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더욱 소중한 생명
가수 아이유의 <마음>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 귀에 쏙 들어온 한 구절이 있었어요.
“세상 모든 게 죽고. 새로 태어나. 다시 늙어갈 때에도. 감히 이 마음만은 주름도 없이. 여기 반짝 살아있어요. 영영 살아있어요.”
한 방송에서 아이유는 여한 없이 생을 살다 떠났을 때 꼭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곡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곡을 꼽았어요. 공연할 때마다 종종 같은 이야기를 할 만큼 특별하게 생각하는 노래랍니다.
“아이유 <마음>(Heart)”- KBS 드라마 <프로듀사> OST
아이유는 언제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항상 살아있고 생동하는 자신의 변함없는 마음을 노래한 것 같아요.
이 노래의 한 대목, “세상 모든 게 죽고, 새로 태어나, 다시 늙어갈 때에도”는 모든 사람이 겪는 인생의 과정을 한마디로 요약한 표현으로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라고요.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늙고 그리고 결국에는 다 죽는다는 자연스러운 이치와 함께 새로 태어나 다시 늙어간다는 것으로 죽음 이후를 바라본 것은 신기했어요.
죽음을 두려움과 슬픔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것은 또한 생명의 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시신기증을 통해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선물함으로 죽음을 앞두었던 사람이 다시 태어나 이전에 없는 삶을 시작하기도 하지요.
또 한 사람의 죽음은 남은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됨으로 살아있을 때뿐 아니라, 죽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니까요.
높은데 올라가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두려움입니다. 고소공포증이라는 말도 있지요. 그때 조금이나마 두려움을 지나칠 수 있는 순간은 저 멀리 도착 지점을 바라볼 때입니다.
물론 두려움의 크기는 여전합니다. 그래도 저 먼 곳의 풍경에 주목하며 도착할 곳을 바라볼 때면 불안한 마음을 조금은 누그러트릴 수 있지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고 숨기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같은 마음입니다.
그때 죽음이라는 두려움에만 사로잡힐 것이 아니리, 그 너머의 생명과 죽음의 의미를 주목하고 바라보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렇게 삶에 찾아오는 수많은 두려움, 죽음을 포함한 그 두려움과 인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주목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눈을 꼭 감거나 여기저기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다가도 이내 그 두려움에 눈길을 보내며 쳐다보는 것이지요.
그것이 죽음의 두려움과 마주하는 지혜입니다.
(그림설명: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년) 이렇게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가며 죽음으로 맞게 되는 현실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면 자신의 삶에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특히 인간은 직접 죽음을 경험함으로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경험한 죽음의 사건과 사고를 통해 죽음과 만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그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또 내가 느꼈을 감정은 무엇인지 그래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함으로 죽음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때에야 삶이 무엇이라고 조금은 말할 수 있겠지요.
40여 년간 무수히 많은 죽음을 접해온 예일대 의대 교수 셔윈 눌랜드(Sherwin Nuland)는 죽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죽는 이유는 그래야 세상이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이라는 기적을 선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보다 앞서 존재했던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이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죽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우리를 위해 죽은 것이다.
그다음은 우리 차례다. 그래야 다른 생명이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