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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조 Mar 26. 2022

3. 예전과는 너무도 달라졌데요

1장 – 처음 들어보는 삶과 죽음 이야기

픽터 프랭클(Victor Frankle)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Auschwitz)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죽음의 수용소』(Man‘s Search for Meaning)는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겪게 된 가장 극단적인 상황인 강제수용소에서 삶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밝힐 수 있다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고민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가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질문했지만, 그는 “과연 이 모든 시련,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런 상황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를 물었습니다. 


삶만이 아닌,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한 것이지요.


즉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나가지 못한다면 이 모든 시련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앞으로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것보다, 여기서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의미가 있는 죽음에 대해 생각했고, 그것이 오히려 지금, 현실에 더욱 집중하게 했습니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자신을 맡길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오늘의 삶을 깊이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오히려 고통의 순간들을 버티게 했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품위 있고 단정한 삶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기본 개념을 세웁니다.     


빅터 프랭클이 강제수용소에서 경험한 죽음과 같은 상황은 아니더라도, 요즘 내 삶 앞에 놓인 어려운 시련이나 도전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상

2020년 초부터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임종 순간과 장례식 일정 그리고 추모행사에 있어서 예전과는 너무도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제대로 묻히기도 힘든 브라질 ‘코로나19’ 상황”- KBS News

어른들 중에는 심지어 상상도 못 할 일들을 겪는다며 놀라기도 해요. 


실제로 코로나19에 감염되면서 폐쇄 병동에 격리되어 치료를 받다 회복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망한 경우, 가족조차도 임종의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합니다. 

장례식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시신은 바로 화장됩니다. 


그리고 화장을 마친 유골의 골분만이 가족에게 전해집니다. 가족마저도 가까이할 수 없는 이런 날이 올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일체의 대면 면회가 금지된 요양시설과 중환자실 환자의 경우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중환자실의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죽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도 나누지 못합니다. 

(그림설명: 중환자실 모습)

각종 의료장비를 온몸에 칭칭 감고 죽음과 싸우는 가족에게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절망적인 마음마저 들게 합니다. 하지만 만날 수 없고, 심지어 접근조차 금지되니 어쩔 수 없지요. 


한 나라, 특정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팬데믹 상황이다 보니 전 세계 곳곳에서 겪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제는 장례식을 하는 경우, 유가족은 지인에게 장례 가운데 한 절차로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글인 부고(訃告, 부고 부/알릴 고)를 전하는 것이 망설여집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으로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족중심으로, 장례식 기간도 최대한 단축해서 간소하게 진행합니다. 


이러한 부담은 부고 소식을 들은 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능하면 장례식장을 찾지 않고 조의의 마음을 전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인이 돌아가신 날에 가족이 모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한된 인원 이상으로 사람이 모이는 것이 금지되면서 고인을 기억하고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행사는 미뤄지거나 취소됩니다. 


예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사람과 사람이 직접 접촉하지 않는 언택트(noncontact)로 슬픔을 나누고 조의를 표하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하지 않는 비대면(非對面, 아닐 비/ 대답할 대/ 낯 면) 시대에 장례식은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되고, 사람들은 추모의 글을 인터넷 댓글로 올립니다. 


때로는 그래서 꼭 임종 장소나 장례식장에 가지 않아도 또 아무리 멀리 있어도 고인으로 인해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마음을 전하는 일들이 가능해졌습니다. 

가상공간에서 추모를 위한 예식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나 때는 말이야!

이런 변화들은 코로나19라는 특별한 상황이서만은 아닙니다. 어른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예전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먼저 죽는 장소를 꼽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대부분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집 밖에서 죽으면, 다른 표현으로 객사(客死, 손 객/ 죽을 사)는 불행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나이 들어 늙도록 오래 장수하며 살면서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결혼해서 또 자녀를 낳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집에서 죽음을 맞기를 소원했습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행복의 기준으로 삼은 다섯 가지 복인 ‘수(壽, 목숨 수)’, ‘부(富, 가멸 부)’, ‘강녕(康寧, 편안할 강/ 편안할 녕)’, ‘유호덕(攸好德, 바 유/ 좋을 호/ 덕 덕)’, ‘고종명(考終命, 상고할 고/ 끝날 종/ 목숨 명)’ 중에서 ‘고종명’에 해당합니다. 

‘오래 사는 복’, ‘부유함을 누리고 사는 복’, ‘큰 우환이 없이 건강하게 사는 복’, ‘덕을 쌓으며 즐기며 사는 복’만 아니라, ‘주어진 명을 다하고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복’인 고종명을 크게 생각했던 것이지요. 


불의의 사고나 억울한 누명 없이 집에서 의연하고 평안한 가운데 죽기를 원했고, 그래서 관이나 수의, 신발과 같은 장례와 관련된 것을 미리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보니, 예전에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임종을 앞두었을 때에도 집으로 모셔와 죽음을 맞게 했습니다. 


또 그때에는 가족이 모두 모여 임종 순간을 함께 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타 지역 또는 외국에 있던 자녀들도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며칠 전부터 달려와 임종을 앞둔 분 앞에 모였습니다.

(그림설명 및 출처: 병원 장례식장 복도에 진열된 조화, 국립민속박물관)

하지만 요즘 집에서 죽음을 맞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임종을 앞둔 순간이 되면 119 구조본부에 전화를 걸어 응급차량 지원을 받아 병원으로 옮겨 중환자실이나 입원실에 머뭅니다. 

가족이나 친척이 가까운 지역에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국내 또는 해외 곳곳에 흩어져 사는 것이 흔하다 보니 가족이 함께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응급상황에서는 병원에서 혼자 외롭게 또는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병원 내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이동해 장례식을 치릅니다.




tvN에서 16부작으로 방송한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마지막 회에서는 주인공 감리 할머니의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이 드라마는 공진이라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할머니가 살던 집에서 장례식을 진행하며 마당 한쪽에는 할머니의 생전 모습, 환하게 웃는 얼굴들이 담긴 사진이 든 여러 액자가 테이블 위에 전시됩니다. 

예전에 마을 결혼식에서 포토 테이블을 보며 자신의 장례식에 이런 것을 준비해달라고 한 요청대로 마련되어 조문 온 사람들은 이 사진 속 할머니를 보며 이전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또 장례식이 진행되는 집 마당에서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것도 할머니가 앞으로 남은 가장 성대한 잔치가 장례식일 텐데, 죽으면 좋은 데로 갔을 테니 감자전이나 붙여먹고 막걸리나 실컷 마시라는 말대로 준비한 것입니다. 


할머니의 소원대로 공진 마을 사람들은 감리 할머니의 장례식을 떠들썩하게 보내고 함께 슬픔을 나눕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한 할머니의 집과 마을 곳곳에 남겨진 할머니와의 추억과 마음에 새겨진 기억들을 떠올리며 나름대로의 애도 시간을 보냅니다.


이 드라마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감리 할머니의 마지막 말과 모습입니다. 

이웃 할머니들과 잠자리에 들며 이야기하던 할머니는 “매일이 소풍 가기 전 날”인 것 같다며 노을이 고와서 좋고, 오징어 맛도 좋고, 여기저기 둘러보니 귀한 것 투성이라며 참 행복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의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 없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사실 이런 예전의 장례식 모습을 알지 못하고 영화나 방송으로만 접한 청소년들은 오히려 병원 장례식장을 중심으로 한 요즘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겠지요. 하지만 1990년대만 해도 병원 장례식장은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나 때는 말이야’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장례식장과 그 안에서의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주거지역 안에 있는 병원에 사람들이 터부시 하며 혐오시설이라고 생각하던 장례식장이 있다는 것, 사람을 살리는 곳에 죽음이 함께 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일로 여겨져 논쟁도 많았습니다.     


메모) 신문 기사에서 보는 바뀐 장례식 풍경 / 다음의 신문기사는 변화된 장례식 풍경을 잘 보여줍니다. "요즘 같은 때도 초상집에 가보면 죽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하는 것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야단법석이다. 지나친 음식을 차려서 먹고 술주정을 하는 등 때로는 싸움까지 나는 일을 볼 수 있다. 별세한 사람의 혼이 있다면 도리어 귀찮아할 것이다.” - <지나친 범절의 폐 결혼식과 장례는 간략하게>, 출처: 매일신보사(1943년 10월 1일)     

 “17일 시할머니상을 당해 3일장을 치른 주부 이미숙(李美淑·38)씨. 이 씨는 “이번에는 장례식을 치렀다는 생각이 안들 정도”라고 고백했다. 병원에 연락해 장례식장으로 옮겨 장례를 마쳤기 때문에 이 씨가 한 일은 친척에게 부음을 전하고 빈소를 찾은 조문객에게 음식 음료를 나른 일이 전부였다. 이 씨가 4년 전 외할머니 상을 당해 고향집에서 5일 밤낮 동안 입술이 부르트면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였다. 장례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비좁은 집이 아닌 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일반화되고 있다.” - 출처: 동아일보(2000년 10월 18일)     




반면에 요즘은 TV 광고에서도 자주 보는 ‘00 상조’, ‘00 라이프’와 같은 상조회사의 도움을 받고, 집이 아닌 영안실이 있는 깔끔한 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주거문화가 개인주택에서 아파트와 빌라와 같은 공동시설로 바뀌면서 살던 집에서 임종을 맞고 임종 후 장례를 진행하기가 번거롭고 불편해진 것이 그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집 주변에서 장례와 관련한 것들을 보기 어려워졌어요. 

예전에는 동네에 누군가의 집 문에서 장례 중임을 알리는 ‘상중(喪中, 죽을 상/ 가운데 중)’이라고 적힌 팻말이나 등을 보거나, 옆집에 검은색 장례예식 용 옷을 입은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보기도 했거든요. 거리를 지나는 장례행렬과 마주 치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제는 가끔씩 도로 위를 지나가는 장례차량을 보는 것 말고는 일상에서 접할 기회가 없습니다. 이렇게 일상생활의 변화와 함께 또 효율성과 편의성을 따라 장례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림설명 및 출처: 장례행렬, 국립민속박물관)


그리고 예전과 달리 가족을 중심으로 친척과 지인이 나서던 하던 장례식의 여러 절차들이 병원과 장례식장의 직원, 장례지도사와 전혀 모르는 분들의 손길로 이루어집니다. 

이분들이 장례식장에서의 조문객 접대부터 고인을 입관하는 일은 물론 화장장 예약과 행정 절차 처리 또 고인을 모실 곳으로 이동할 차량준비까지 맡아서 해줍니다. 물론 돈을 내야 하지만요. 


옛날이라면 가족의 정성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미리 준비하거나 신경 쓸 일이 적어졌으니 편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만큼 일상에서 신중하게 죽음을 생각하거나 죽음을 구체적으로 의식하는 일도 적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흑사병과 그림 <죽음의 춤>

흑사병이 창궐하던 14세기 유럽에서는 <죽음의 춤>(The Dance of Death, danse macabre)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교회나 수도원 혹은 공동묘지의 벽이나 조그마한 책자의 삽화로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그림설명: 독일 베를린, <죽음의 춤>)

이 그림은 오래된 건물의 벽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벽 층 아래에 프레스코 화로 그려진 것을 발견하면서 알려졌어요. 

중세에 흑사병의 물결이 온 유럽을 뒤덮었을 때 죽음의 필연성과 회개를 외쳤던 탁발 수도사의 설교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합니다. 


이 <죽음의 춤> 그림은 16세기를 정점으로 수도원과 공동묘지에서 점차 사라집니다.   


그림 밑에 항상 붙은 글귀는 ‘바도 모리’(Vado Mori)라는 연작시의 첫 구절과 끝 구절에 반복되었던 구절, ‘나는 죽으러 간다네’입니다. 

서울대학교 중세르네상스연구소에서 출간한 『중세의 죽음』을 보면, 시의 내용 중 일부는 이렇습니다.     

 

“나는 죽으러 간다네(vado mori). 죽는다는 것은 확실하다네.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네. 다만 그 시간이 언제일지 불확실할 뿐이라네. 나는 죽으러 간다네.”      


이 그림은 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이는데, 먼저 공통점은 모든 계층의 사람이 죽음에 이르고, 죽음을 일상적인 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반면에 누군가의 죽음이 가족과 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일에서 개인의 일로, 그리고 죽음이 성찰의 대상에서 무관심이나 갑자기 만나는 두려움으로 변했다는 점은 차이점으로 확인됩니다. 몇 가지 예로 설명해 볼게요.     




먼저 베를린 마리엔 교회에 있는 그림입니다. 

(그림설명: 독일 베를린, <죽음의 춤>, 1480-1500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손을 잡고 둥글게 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춤을 주도하는 것은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입니다. 

이 작품에는 그림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위치하면서 왼쪽에는 성직자를 비롯한 종교인들이, 오른쪽에는 세상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에서 교황까지, 광대에서 황제까지 죽음 앞에서는 누구에게도 특권이 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신기하게도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과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서로 미소까지 짓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도망치기는커녕 순순히 죽음에 몸을 맡깁니다. 

그림 아래 글귀에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대화가 나오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언제나 ‘주여 도와주소서’라는 기도로 말을 끝맺습니다. 

                                                            

또 다른 그림은 스위스 바젤에 있는 작품으로 숨은 그림까지는 아니어도 위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몇 가지 바뀐 것을 찾을 수 있어요. 

(그림설명: 스위스 바젤, <죽음의 춤>, 1440년)


먼저 인물들의 대열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합니다. 가장 왼쪽에는 교황이 오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차 신분 서열이 낮아집니다. 

대열의 끝에는 납골당이 있는데, 납골당 문 위로 보이는 그림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리스도, 그 아래로 대천사 가브리엘, 그리고 양편에 선인과 악인이 등장합니다.


눈에 띄는 것으로 죽은 사람의 움직임은 역동적인 반면, 산 사람의 발걸음은 느릿느릿합니다. 죽은 사람이 기다리지 못하는 듯 빨리 오라며 손짓을 하거나 억지로 끌어 잡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며 산 자를 납골당으로 유혹하기도 합니다. 

죽음에 대해 순응적이라기보다는 조금씩 불안감과 반항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또 각 쌍들은 서로 손을 놓고 있는데, 앞서의 그림이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며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상을 주는 것과는 달라 보여요. 사람들과의 관계의 끈이 끊어진 것처럼 각각의 쌍을 따로따로 묘사합니다. 

죽음 앞에서 불안해 보이는 각 사람의 모습이 실제적입니다.   


그리고 이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그림이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이 그린 작품들입니다. 

(그림 설명: <죽음의 춤-추기경>, <죽음의 춤-탁발수도사>, <죽음의 춤-주교>,  <죽음의 춤-부자>, <죽음의 춤-설교자>)


수도원이나 공동묘지가 아닌 그림책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글을 설명하는 삽화 정도가 아닌, 그림 자체가 독립적이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여기서 인물들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그려졌고 각각 다른 공간에 속해 있습니다. 탁발 수도사는 교회 안에, 설교자는 연단 위에, 백작은 야전에, 그리고 부자는 가게 안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포도넝쿨이 우거진 곳에 앉아 있는 ‘추기경’은 죽음이 찾아온 것을 알지 못하는 듯, 옆에 서서 장난을 해도 알아채지 못하고 자기 일만 할 뿐입니다. 


‘설교자’는 죽음의 필연성에 대해 설교하는 중일 텐데, 그 뒤에 이미 죽음이 성직자를 찾아와 서 있습니다.


반면 ‘탁발 수도사’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죽음이 잡아끄는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합니다. 이들은 끔찍한 지옥의 고통과 세속의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이 주된 일이었는데, 그의 오른손은 돈 주머니로 보이는 것을 힘껏 부여잡고 있습니다. 


‘부자’도 죽음이 자기 돈을 훔쳐가는 데만 관심이 많습니다. 아쉬워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재산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죽음의 춤> 작품 속의 사람들은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습니다. 자기가 속한 곳에서 일상생활을 하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죽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일만 합니다. 아니면 자신을 찾아온 죽음을 보고는 무서워하거나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도망가는 모습입니다.  

   

연명의료에 대한 고민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달라진 이유 중의 하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껄끄럽고 불편해서도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의료기술의 발달 때문이기도 합니다. 


질병과 사건사고로 죽음은 여전히 두렵고 무섭지만, 의학기술의 발달로 많은 질병을 고치면서 사람들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질병을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한편으로 무의미하게 생명을 유지하려는 경우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2016년의 경우, 한 해 우리나라 총 사망자 28만 명 중 75%인 21만 명이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 상당수는 의학적으로 소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상황에서 생명연장을 위한 다양한 처지를 받으며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합니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라는 긴 제목의 법에 대해 들어봤나요? 약칭 ‘연명의료 결정법’으로 불리는 이 법은 2018년 2월 4일 이후 시행되고 있습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신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에 따라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한 법으로 미국(1976년), 대만(2000년), 영국(2005년) 등에서 유사한 법이 이미 시행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연명의료’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하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및 그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의학적 시술로서 치료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을 말합니다(위 법률, 제2호). 

이 법에 따라 연명의료의 중단이 ①연명의료계획서, ②사전연명의료의향서, ③환자가족의 진술(19세 이상으로 배우자와 1촌 이내의 직계·비속의 전원 합의)을 통해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의사와 의사의 의학적 판단에 반하지 아니하는 경우에 가능해졌습니다(위 법률, 제15조).     


여기에는 ‘호스피스·완화의료’ 운영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종교인,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전문팀이 말기 환자의 통증 및 증상을 적극적으로 조절하고 환자와 가족의 심리적·사회적·영적 고통을 경감시켜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의료입니다. 

담당의사가 말기 진단 및 말기 통보를 하고 호스피스·완화의료 이용 의향을 확인하는 절차로부터 시작됩니다.


호스피스에서는 안녕(well-being sense), 통증(pain), 수면(sleep) 3가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의료적인 돌봄, 사회적인 돌봄, 영적인 돌봄의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현대적 의미의 호스피스 개념을 주장한 영국 의사 시슬리 손더스는 “오늘날 호스피스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뿐만 아니라, 임종이 가까운 환자를 위해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돌봄의 공동체이며, 관심의 초점은 환자와 그 가족에게 둔다”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1935년 성누가병원에서 임종자에게 사용했던 약물에서 새로운 면을 발견했습니다. 즉 약물로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통증이 완화될 때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으며 죽는 날까지도 분명한 의식으로 남은 생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병원에서 진통제를 정규적으로 제공하는 치료법을 시행했고, 이것을 현대 호스피스의 통증 조절 지침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메모)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한 오해들 /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한 오해로 첫째는 호스피스는 비용 부담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호스피스도 일반병원과 같이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말기 암 환자는 본인 부담금으로 5%만 적용됩니다. 둘째로 호스피스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시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호스피스 전문기관에서는 환자를 힘들게 하는 통증, 구토, 호흡곤란, 복수 등의 증상을 적극적으로 치료합니다. 심리·사회적 지지 등 돌봄과 음악·미술요법도 제공합니다. 셋째, 호스피스 전문기관에서는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으며 가족의 심리·사회적 어려움도 도움받을 수 있습니다. 넷째,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고 증상이 조절되어 컨디션이 잘 유지되면 언제라도 퇴원하고, 필요하면 재입원할 수 있습니다. - 출처: 국립암센터 중앙호스피스센터 홈페이지(http://www.hospice.go.kr/)     


이 법이 만들어진 데는 몇 가진 앞선 사건이 있었기 때문인데, 핵심은 존엄한 죽음을 위한 의사결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법원은 2009년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사건’의 판결을 통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질병의 말기나 노령에 이르렀을 때 치료의 지속 여부 및 치료 내용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환자 본인이라고 판시했습니다. 


2009년, 76세의 김 할머니가 폐암 발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검사를 진행하던 중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식물인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와 같은 생명연장 장치에 의존해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때 할머니의 가족은 평소 할머니의 뜻을 전하며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병원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소송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대법원은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단계에 진입했고,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는 경우라면 해당 환자에 대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관한 사회적 공감대가 점차 확산되면서 이 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안내”-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사람이 죽음에 임박한 단계에서는 의식이 없거나 약물치료 등으로 혼미한 상태가 되어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나 맞이하게 될 마지막 단계의 의료적 처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미리 밝혀놓는 것이 당사자의 고통은 물론 치료를 주관하는 의사,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미리 작성하는 것이 연명의료 결정법에서 마련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입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이면 건강한 사람도 작성해 둘 수 있는데, 다만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보건소, 의료기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한 사업을 수행하는 비영리법인 및 공공기관)을 찾아가 충분한 설명을 듣고 작성해야 합니다. 

등록기관을 통해 연명의료 정보처리 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되어야 비로소 법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후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인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라고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명이 의학적으로 판단하는 경우, 이 서식에 따라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게 됩니다.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그럼에도 연명의료를 끝까지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이나 그 가족의 간절한 바람은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연명의료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때 환자가 겪게 될 고통과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에 대한 의미, 그리고 가족의 여러 가지 부담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생명유지를 위해 많이 시행하는 ‘심폐소생술’은 심장 박동이 멈추고 호흡이 멎었을 때 가슴을 반복적으로 누르고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는 의료행위입니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갈비뼈가 부러지는 경우, 심장과 폐의 손상과 기흉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림설명: 심폐소생술과 기도 내 삽관)


생명유지를 위한 ‘기도 내 삽관’은 기도에 공기를 불어넣기 위해 강철로 된 기구를 이용해 플라스틱 튜브를 기도로 삽입하는 것입니다. 부작용으로는 튜브를 삽입하는 과정에서 치아 손상, 인두나 성대에 상처가 유발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 후로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장기화될 경우에는 기도가 붓거나 썩게 되어, 목에 구멍을 뚫는 기관 절개술로 전환해야 합니다. 


‘제세동기’는 심장 박동이 불규칙할 때 전기충격을 줘서 정상으로 되돌리는 응급치료 기계로 피부 화상, 감전사고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공호흡기 부착’은 기도에 삽입한 플라스틱 튜브로 폐에 일정하게 산소를 불어넣어 주기 위한 것으로, 부작용은 기도 내 삽관의 부작용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좋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안락사와는 다른 것으로 연명의료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평소에 지내던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개념을 포괄한 통합적인 개념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라-좋은죽음, 나쁜죽음”- EBS 다큐프라임 <데스 1부-메멘토 모리>

메모) 좋은 죽음이란 / 2010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연구소(EIU)가 국가별 ‘죽음의 질(Quality of Death Index)’에 대해 조사한 것에서 한국은 낮은 점수를 받았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OECD 40개 국 중에서 32위(10점 만점에 3.7점/ 최상위 10개국 평균점수 6.9점의 절반)였다고 합니다.

영국은 5년여에 걸쳐서 ‘좋은 죽음(Good Death)’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얼마나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느냐에 대해 연구했고 그 결과 마지막 10년의 삶의 질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영국은 호스피스 예산의 66%가 기부라고 합니다. 왕실, 정부, 민간단체가 ‘편안한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국민의 공감대를 얻은 것입니다. 

영국이 죽음의 질 1위가 된 배경에는 의료 인프라(practice), 정책(policy), 사회 인식(public)의 세 박자가 갖추어져서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합니다. 영국은 ‘좋은 죽음’의 조건으로 다음의 것을 꼽습니다. 첫째는 익숙한 환경에서, 둘째는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셋째는 가족 친구와 함께, 넷째는 고통 없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2008년 국립암센터의 조사는 죽음을 앞둔 말기 상황의 환자와 보호자의 상반된 태도를 보여줍니다. 


“질병 말기 상황에 대해서 환자가 알아야 한다”는 질문에 91.8%가 그렇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반면, “자신이 말기 상태임을 알고 있는 환자는 얼마입니까?”라는 질문에 26%만이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즉 우리나라 말기 암 환자는 상당수가 자기가 말기 암인 줄도 모른 채 앓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 암 3-4기에도 병이 낫는 사람이 상당히 있지만, 말기 암은 이 단계를 훌쩍 지나 수술도, 항암 치료도 소용이 없는 단계입니다. 남은 생명은 약 2개월 안팎으로, 이 시기를 놓치면 지난날을 정리하고 가족과 차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말기 암임을 알지 못하고 죽음에 이릅니다. 죽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부담스럽고 불편해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물론 충격을 받을 환자도 걱정되지만, 그만큼 평소에 죽음을 생각하거나 미리 준비하지 못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과 유익 중의 하나는 죽음에 대한 태도를 미리 취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생물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의식하며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의식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입니다. 

더욱이 인간은 죽음의 징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의식할 수 있고, 죽음에 대한 의식 가운데서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미리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애플사의 CEO이었던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년)가 스탠퍼드대학 졸업식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는 연설에서 1/3에 해당하는 많은 분량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할애했습니다. 

예전에 “만약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라는 문구를 읽었는데,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그는 물었다고 합니다.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내가 오늘 하려고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할까?” 


그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 여러 날 동안 ‘아니오’로 이어질 때, 그는 그때야말로 무언가 변화할 필요가 있는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갔었습니다. 2004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고 앞으로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 주변을 정리하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직검사 결과 매우 드물게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암이었고, 수술을 받고 괜찮아져서 스탠퍼드대학에서 연설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죽음을 지적으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그 자리에서 졸업생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에 대해 배웠고 그것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낡아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허비하지 말 것을,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관습의 함정에 빠지지 말 것을, 사람들의 견해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말 것을 깨달았다고 졸업식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정말 중요한 것과 외부의 기대나 부담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인생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모든 자부심, 모든 좌절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런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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