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동안 매일 요한일서 읽기
요한일서를
반복해서 읽기 시작한 건
존 맥아더의
『어떻게 성경을 공부하는가?』라는
책을 읽고 나서였다.
그는 신학생 시절에
'30일 동안 매일 요한일서 읽기'라는
독특한 성경 읽기 방법을 소개했다.
'그저 앉아서 읽으라'
첫째 날에도, 둘째 날에도, 셋째 날에도…
그저…. 앉아서….
읽으라는 것이다.
그러다 일곱째 날 여덟째 날이 되면
'점점 지루해지네.'
'이 부분은 읽을 만큼 읽었어.'
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바로 이 고비를 지나야 만
30일을 버티고
요한일서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해보았다.
그런데
내게 온 고비는 빠르고 오래 지속됐다.
일곱이 아니라 열 번을 반복해도 그랬다.
'지루해서인가?'
'문장 구성 형식이 낯설어서인가?'
'주위가 산만해서겠지.'
그리고,
가끔, 아니 그 보다 더 자주….
그냥 지나치고, 잘 못 읽고,
읽고 나서 기억이 안 나고,
읽으면서도 해석이 안 되었다.
명사와 동사로 이루어지는
문장 단위는 습관처럼
대충. 짐작하여 읽기도 했다.
그러다 책에서 말하던 '그 고비'를
넘긴 어느 날,
문장이 새롭게 읽히기 시작했다.
형용사와 부사가 들어오고,
접속사와 어미조차
감사와 마음을 찌르는 아픔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을 사로잡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담대하라'라는 말이었다.
'담대하라'는 내 기도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였다.
'담대함을 주소서.'
'담대케 하소서.'
입술로는 자주 올렸지만,
나의 기도 속 '담대함'에는
어떤 절실함이 있었던 걸까?
특별한 감동 없이,
습관처럼 드렸던 기도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요한일서 속 '담대하라'는 말씀이
며칠 째 내 마음속에서
덜컹덜컹 마음의 문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새벽 묵상 후,
요한일서를 펴고
'담대하라'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그토록 마음을 사로잡던 그 단어가
요한일서에
단 '네 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네 구절이
내 마음을 전부 채우고 있었고,
하나님은 나에게
'네 가지의 담대함'을 말씀하고 계셨다.
한 때,
요나의 삶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많이 울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은
요한일서 4장 16절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아직도 이 말씀의 힘은
고단한 나의 삶에
커다란 위안이 되어주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나님은
네 번의 '담대하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에 더한
네 가지의 담대한 모습을 원하고 계셨다.
첫 번째 ‘담대함’은
그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한
‘담대함이다.
이 담대함은 우리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고,
그가 가르치신 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나오는 '담대함’이다.
두 번째 ‘담대함’은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이에게 주어지는
‘담대함’이다.
순종에서 오는 양심의 평안,
그리고 그 평안에서 비롯된
'담대함’이다.
세 번째 ‘담대함’은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누리는
‘담대함’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누리는
두려움을 내쫓는 ‘담대함’이다.
마지막 ‘담대함’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만이 누리는
신뢰의 ‘담대함’이다.
이미 들으셨음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용기,
그 용기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담대함이다.
내게 ‘담대하라’는 단어는
더 이상 단순한 명령이 아니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순종하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사랑의 선물이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시대,
우리의 담대함은
내가 얼마나 강하냐가 아니라,
누구 안에 거하고 있는가에서 결정된다.
오늘도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헤아릴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마음은
요한일서 속 네 번의 '담대하라'를 통해
'참된 담대함으로 나아오라'라고
부르고 계셨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요한복음 16장 33절로 이어졌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