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나를 가장 늦게 챙겼을까

유안진 <내가 나의 감옥이다>

by 지나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을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png


언제부터였을까.

내 안의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된 건.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은 자동으로 리스트를 돌린다. 오늘 해야 할 일, 챙겨야 할 것들, 잊지 말아야 할 약속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바쁘게 하루를 살아낸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하루 종일 무언가를 '처리'하며 지내는지도 모른다. 감정이든, 집안일이든, 관계든.


하지만 문득, 나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뭘 좋아하고, 뭘 원하고, 어떤 순간에 가슴이 뛰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유안진 시인의 시처럼, 나도 모르게 두 눈을 다 팔아버린 건 아닐까.

언제부턴가 나는 나를 보기보다, 남의 시선을 먼저 살피기 시작했다. 내 감정보다는 ‘어떻게 보일까’를 먼저 고민했다. 마음이 피곤하면 그냥 누워 있어도 되는데, 게으르다고 여겨질까 봐 일부러 분주한 척을 한다. 내키지 않는 자리에도 ‘나만 빠지면 이상할까 봐’ 나를 꾸역꾸역 끼워 넣는다. 그렇게 나는 나를 자꾸만 안 보이는 쪽으로 밀어두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시큰하다.

겉은 괜찮다며 웃지만 속은 눅눅하게 젖어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넌 잘하고 있어.”

하지만 내 안에선 또 다른 내가 말한다. “나, 지금 여기에 없어.”


나는 나를 내 손으로 가뒀다.

가시껍데기로, 떫은 껍질로, 체면과 의무와 익숙함이라는 감옥으로.


그런데 이상하다.

그 감옥이 너무 익숙해지니까, 밖이 더 낯설고 두려워진다.

나를 감싼 그 무게들이 없으면

텅 빈 사람처럼 느껴질까 봐.


하지만 이제는,

그 감옥에 평생 갇혀 지내고 싶진 않다.

내 마음이 무거울 땐 가만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뭔지를 천천히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매일의 삶 속에서 많은 역할을 감당하며 산다.

하지만 이제는 가끔, 그 모든 역할을 내려놓고

내가 '나'로 있는 시간을 내어주기로 했다.

그게 바로 내가 나를 풀어주는 첫 번째 열쇠니까.


오늘도 문득 고개를 들고 거울을 본다.

여전히 조금 피곤해 보이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있는 얼굴.

그 얼굴을 향해 이렇게 말해본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조금씩, 내 안의 감옥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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