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질 것 같았던 여름, 피어 있던 나

이성복 <그 여름의 끝>

by 지나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png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여름처럼,

그저 한 장면을 조용히 펼쳐 보일 뿐이다.

그 안에 담긴 무언가가 우리를 멈추게 하고,

말 없이 마음에 닿는다.


그 여름.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다.

어디에도 기대고 싶지 않았고,

무엇에도 의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절망이란 말이 익숙해지는 계절이었다.

창밖으로 세찬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그 비가 내 안으로도 흘러드는 기분이었고,

문득 모든 것을 놓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기댈 데 없이 버티고,

아무도 몰래 다시 일어섰다.

백일홍처럼.

폭풍이 몇 차례나 지나가도

그 나무는 꽃을 매달았다.

쏟아지는 절망처럼 붉은 꽃을.


나도 모르게 버텼고,

나는 그 절망 위에 무언가를 매달고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건 삶을 향한 작은 고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라도 살아야지."

"이런 날도 지나가겠지."

"끝이 나겠지."

이 짧은 생각들이

작고 뜨겁고 붉은 마음처럼 내 안에서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그런 것이다.

쓰러질 법한데도 피어난 꽃.

버려질 법한데도 마지막까지 타오르는 불빛.

누군가가 “이젠 끝이야”라고 말할 즈음,

조용히 다시 시작되는 계절.


절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어느 날 장난처럼 고개를 돌리고,

꽃처럼 피어난 무엇으로 바뀐다.

그러니까 우리는

끝인 줄 알았던 그 여름이

사실은 시작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 여름의 나처럼,

누구든 삶의 폭풍 속에서

넘어지고 다시 매달리고

그러면서도 어딘가에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그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절망은 장난처럼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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