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믿는다는 말은 언제부터 이렇게 조심스러운 표현이 되었을까. 예전에는 큰 각오가 필요한 문장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몇 번 얼굴을 맞대고, 말의 속도를 기억하고, 약속이 어떤 식으로 지켜지는지를 보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이었다. 믿는다는 말은 선택이라기보다, 시간을 함께 보낸 뒤에 남는 감각에 가까웠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굳이 경계를 세우지 않아도 되는 상태, 말의 뒷부분을 미리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같은 것.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말 앞에는 망설임이 먼저 따라붙는다. 이번에는, 그래도, 조금만. 그 말들은 대부분 경험에서 왔다. 크게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속에 남는 일들이 쌓이면서 생긴 조심성이다.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장면이었을지 몰라도, 그 일을 겪은 쪽에서는 오래 기억하게 되는 순간들.
사람을 믿지 않게 된 계기는 대개 작은 순간들이다. 믿고 내 마음을 이야기했는데, 그 자리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듯 보였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 전혀 다른 태도로 돌아섰을 때. 조심스럽게 꺼낸 말들이 그에게는 잠깐의 대화쯤으로 남았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비밀스럽게 나눈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그 말이 돌아왔을 때도 있다. 이름만 바뀐 채, 맥락이 빠진 채, 누군가의 입을 거쳐 흘러온 문장 속에서 나는 내가 건넨 말을 알아본다.
관계 안에서 이용당했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다. 도움을 주는 일이 자연스럽다고 여겼던 관계에서, 어느 순간부터 그 도움만 남았다는 걸 깨닫게 될 때. 내 상황은 묻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만 연락이 오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만 기대되는 관계라는 걸 늦게 알아차릴 때. 그런 깨달음은 언제나 조용히 온다. 화가 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말을 아끼게 만든다.
이런 일들이 몇 번 지나고 나자, 나는 어느 순간부터 먼저 나서서 사람을 챙기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하던 일들이었다. 먼저 안부를 묻고, 빠진 사람의 자리를 신경 쓰고, 말하지 않아도 필요해 보이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던 습관 같은 것들. 특별히 애써서 한 일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쪽이 나에게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을 열었던 순간들이 어긋난 채 돌아오고, 공감이라고 믿었던 태도가 가벼운 말로 흘러가고, 나의 사정은 중요하지 않은 채 역할만 남는 관계를 몇 번 지나고 나자, 그 습관은 조금씩 사라졌다. 먼저 묻지 않게 되었고, 굳이 알아보지 않게 되었고, 괜찮은지 확인하던 말들을 속으로만 접어 두게 되었다. 그 변화는 갑작스럽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었다.
나는 그 상태를 무관심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외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서지 않는 태도는 차가움이 아니라 방어에 가까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쪽이 나를 덜 소모시켰다. 그렇게 거리를 두는 동안, 나는 그나마 숨이 편해지는 느낌을 얻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 무관심은 다른 이름으로 돌아왔다. 냉정하다는 말, 무심하다는 말. 예전에는 잘 듣지 않던 표현들이 내 쪽을 향해 붙기 시작했다. 먼저 챙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태도에 이르렀는지 말하지 않았다. 설명하는 일마저 또 다른 소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든 태도가 다시 나를 향한 화살이 되었다. 예전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앞에서 지금의 나는 달라진 사람이 되었고, 그 변화는 종종 부정적인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변화가 생겨난 자리가 어디인지. 무관심은 무책임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였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사람을 믿는다는 말은, 예전처럼 마음을 활짝 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알려준 결론을 바로 꺼내 들지 않고, 조금 더 지켜보는 일. 이 사람도 결국 같을 거라는 생각 대신, 아직은 모른다는 상태를 허락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사람을 믿게 되는 순간은 아주 작은 장면에서 온다. 말한 내용을 잊지 않고 다시 물어봐 주는 태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상황에서 책임을 선택하는 움직임,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같은 말을 해 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순간. 그런 장면 앞에서 우리는 조금 마음을 풀어놓는다.
그때의 믿음은 전부를 맡기는 형태가 아니다. 예전처럼 아무 조건 없이 기대하는 감정도 아니다. 대신 조심스럽고, 범위를 알고 있고, 언제든 조정할 수 있는 상태에 가깝다. 다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경험을 지나온 상태로 관계를 이어가겠다고 정하는 일이다.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일은 어렵지 않다. 기대를 낮추고, 거리를 유지하고, 말을 줄이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지내다 보면 관계는 점점 얇아진다. 다시 믿기로 하는 선택은 그래서 언제나 구체적인 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지, 지금 이 말은 내 안에 조금 더 두는 편이 나은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다시 사람을 믿는 법은 결국 다시 사람을 만나는 방식과 닮아 있다. 너무 앞서 가지도, 너무 뒤로 숨지도 않으면서, 지금의 나로 한 걸음 다가가는 일. 그 한 걸음이 언제나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를 더 닫히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 정도면, 지금의 우리에게는 충분히 조심스럽고도 현실적인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