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을 선도하는 나의 관식이

나의 관식이 이야기

by 지나



"애기야 가자!"


2004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김정은에게 했던 말이다. 이 드라마 덕분에 연인을 '애기'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부터 이미 사랑스럽고 귀여운 연인을 '애기'라고 부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나의 관식이다.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나는 ‘애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애교도 없고 귀여운 외모도 아니다. 오히려 딱딱하고 무뚝뚝하며 투덜거리기 일쑤인 평범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콩깍지가 씌운 관식은 연애 초기였던 90년대 후반부터 나를 ‘애기’라고 불렀다. 그러니 2004년쯤에는 내 이름이 뭔지도 가물거릴 정도로 나는 완전히 ‘애기’였고, ‘애기’는 곧 나였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애기~~!” 하고 불러서 민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누가 밖에서 나를 어떻게 부르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어색할 정도다. 이제는 ‘애기’라는 호칭이 나를 대표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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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라는 말이 유행이 되자 가장 억울해했던 사람은 당연히 관식이었다. “아니, 내가 먼저 쓴 말인데, 내가 따라 하는 사람 같잖아?” 하며 자주 투덜거렸다. 유행이 되면 항상 따라 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나나 그는 그런 걸 일부러 피하는 성향이어서 그 억울함이 충분히 이해됐다. 그렇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제가 원조예요.” 하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의도치 않게 트렌드세터가 된 관식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애기~~~~”, “애기 애기 애기” 하며 장난 반, 애정 반의 말투로 부른다. 회사에서 전화를 받을 때도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 톤 변화에 놀란다고 한다. “아, 저 사람 아내랑 통화하나 보네.”라고 느낄 정도라니 말이다. 게다가 휴대전화 저장 이름도 ‘애기’다. 바탕화면에 하트 아이콘과 함께 따로 빼놓아서, 내가 전화를 걸면 화면에 ‘애기’와 하트가 동시에 뜬다. 도대체 이 사람의 머릿속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걸까. 이제는 반백이 되어 흰머리도 나고 얼굴도 예전 같지 않은데, 그는 여전히 나를 ‘애기’라고 부른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하면, 그의 대답은 뻔하다. “당연하지. 애기니까. 애기니까 애기라고 부르지.” 하고 씨익 웃을 것이다.


그의 기억 속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20대 중반의 모습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과 추억과 사랑이 한 겹씩 쌓이고 또 쌓여 단단한 벽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나 역시 그에게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지 않다. 오히려 내 이름이나, 누구 엄마 같은 다른 호칭으로 부르면 어색하고 서운할 것 같다. 심지어 화가 날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여전히 기억 속의 ‘애기’이고 싶고, 그렇게 불릴 수 있도록 노력한다. 외모는 세월 앞에 자연스레 변하지만, 마음과 추억, 그리고 사랑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

그는 “그냥 애기니까 애기라고 부른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단순해 보이는 말 속에 담긴 감정의 깊이를. 그 이름 하나가 우리를 지금까지 부드럽고 단단하게 이어주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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