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는 손맛이 좋은 편이다.
고로 내 엄마도 손맛이 아주 좋은 편이다.
맛의 고장 광주로 장가 온 우리 남편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광주 맛집이 어디야?"란다.
그 많은 한정식과 떡갈비 맛집에, 김치찌개 하나만 시켜도 9첩 반상이 차려져 나온다는 전라도로 장가를 갔으니 순수한 궁금증 보다는 부러움이 얹어진 질문이다.
왜인지 모르게 으쓱해진 신랑은 본인이 경험한 맛집 빅데이터 회로를 돌리고 돌려 미슐랭 투스타에 선정되어도 부족하지 않을 단 하나의 맛집을 선택한다.
"수완동 ㅇㅇ아파트 ㅇㅇㅇ동 ㅇㅇㅇ호, 거기가 찐 주민 맛집이야!"
물론 우리 엄마네 주소다.
친정부모님은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식사 대접을 할 때, 고급스럽고 좋은 레스토랑에서의 외식보다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 하신다.
외식이 잦아 집밥이 그리운 첫째 사위에게는 건강한 엄마 밥상 컨셉의 한상을 차리고,
시골에서 자라 건강한 집밥이 지겨운 둘째 사위에게는 제대로 화려한 전라도의 양념 맛을 선보여준다.
여기에 한껏 물이 오른 제철 재료와 엄마표 및 지인분들에게 그러모은 확신의 레시피들을 더해 최고의 밥상을 준비하시는 거다.
하지만 손주들이 태어난 후부터는 그 귀한 밥상의 주인공은 바뀌었다.
손주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엄마는 광주 맛집의 간판을 '처가'가 아닌 '외가'으로 바꾸고 명절보다도 더 바쁘고 더 치열하게 화려한 잔칫상을 차려내신다.
입맛도 아롱이 다롱이인 손주 각자의 최애 메뉴를 모두 반영해서 말이다.
오래된 압력밥솥이 오랜만에 열일하는 LA갈비, 따라하기 힘든 깊은 맛의 소고기 뭇국, 튀김옷이 아주 그냥 화가 나서 식어도 바삭한 새우튀김, 맛난 김장김치가 하드캐리 한 김치찜까지 어느 것 하나 빠트릴 수 없는 필수 코스다.
어디 그뿐이야.
외할머니집에 다녀 와서 살이 쪄있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이 챙겨먹이시는 간식들은 아이들의 환호성과 둥근 턱살을 함께 불러들인다.
아이들과 함께 도넛 가루를 직접 반죽해 튀겨내는 추억의 퍽퍽한 도나쓰에 직접 만들어 살엄음 끼게 얼려놓으신 식혜, 촌스럽지만 이상하게 맛있는 외할머니표 식빵 피자, 방앗간에서 갓 뽑아 온 말랑 쫀득 가래떡과 환상의 짝꿍인 조청, 기름에 튀겨 설탕 솔솔 뿌려먹는 건빵은 사먹는 간식에 익숙한 아이들에게는 생소하면서도 외갓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신나는 맛인 거다.
흡사 마을 잔치 같았던 외가 나들이를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다음 끼니부터 손주들은 피치 못하게엄마 vs 외할머니의 손맛대결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 집 저녁 메뉴 중 오늘 밤 대결을 펼칠 비운의 주인공은 바로 소고기 뭇국이다.
아무래도 자주 하는 메뉴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할머니의 손맛과 비교가 되나 보다.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 ‘오늘은 내가 너희 외할머니 뭇국 맛을 구현해 내리라’ 다짐해 보지만 음식 간을 보고 또 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상하네, 넣는 재료도 똑같고 조리 순서도 같은 거 같구만 맛이 안 나네."
엄마가 보내 준 국간장과 천일염으로 간을 하니,
기본양념 바탕이 똑같은데 왜 그 맛이 안 날까?
물론 내 방식의 소고기 뭇국도 맛있다!!
한~ 냄비를 끓여놓으면 두 번, 세 번 고기 리필과 국물 리필을 외치며 흡입하는 가족들을 보면
분명 그렇다.
국물 간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아들이 말한다.
"엄마 꺼도 맛있어~ 근데 할머니 국이랑 느낌이 달라."
"느낌? 어떻게 다른데?"
"엄마 뭇국이 따듯한 맛이라면,
외할머니 뭇국은 그리운 맛이야."
찡... 그래, 그래.
나도 엄마의 뭇국이 그리운 날이 많았어.
학교에서 친구와 다투고 우울했던 날,
수험생활 하면서 나만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 초라했던 날,
회사에서 왕창 깨지고 바보 같은 내 모습에 어깨가 처졌던 날,
서툰 육아에 빵으로 끼니를 때우다 속이 쓰렸던 날,
손이 오그라들게 너무 추워서 콧물 훌쩍이며 현관문을 열었던 그 날.
그 모든 날에 엄마가 정성과 시간을 들여 뜨끈하게 끓여 준 뭇국이 그리웠어.
엄마는 겨울 무가 맛있다며, 모아두셨다.
가을 도토리를 모아 겨우내 꺼내먹는 다람쥐처럼 겨울 무를 신문지에 돌돌 말아 김치냉장고에 저장해두곤 했었다. 가을 무와 겨울 무가 얼마나 다른 맛이 나는 구분할 재간은 없었지만, 엄마가 신문지를 헤치고 꺼낸 무를 나박나박 썰기 시작하면 나는 벌써 설레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게 맛있는 뭇국을 끓여주고 싶었던 엄마는 옆동네 정육점까지 가 치마양지를 구해오셨고,
직접 농사지어 짠 참기름에 고기를 달달 볶아 국물이 잘 우러나도록 정성을 들이셨다.
엄마표 국간장,
시간의 힘으로 간수를 빼내 쓴맛 쏘~옥 빠진 천일염,
그 자리에서 바로 다지는 생마늘의 향까지
모두 엄마의 소고기 뭇국을 완성시키는 주인공들이다.
고소한 육향이 짭쪼롬하게 몽글몽글 맛있는 냄새로 변신해 나의 침샘을 저릿하게 자극하기 시작하면 국이 다 끓여진 거다.
잘게 썬 파를 향긋하게 고명으로 얹어
후춧가루를 무심하게 톡톡 뿌리고는 내 앞으로 밀어주던 엄마의 손길과,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삼키기도 전에 콧소리 가득한 감탄을 내뱉는 나를 보며 '으이그~' 하고 웃어주던 엄마의 눈길이 그립고 또 그립다.
우리 아이들은 어떤 음식으로 날 그리워하게 될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엔 옆구리 찔러 절 받는 마음으로 물어본다.
닭곰탕, 엄마표 파스타, 김밥, 소고기 뭇국이란다.
유후~ 소고기 뭇국이 들어갔잖아?!! (역시 절은 옆구리 찔러 받는 게 최고다.)
지금 너희가 느끼는 그 '따뜻한 맛'이 세월이 흘러 뒤돌아보면 '그리운 맛'이 될 거라 생각하니,
오늘 끓여내는 소고기 뭇국의 마지막 레시피는 아무래도 사랑을 가득 담은 엄마표 뽀뽀 공격이 될 것 같다.
내가 그리워 한 건 단순히 뭇국이 아니라 언제나 날 온전히 받아내주던 엄마가 아니었을까.
오늘은 내 그리움을 뒷배 삼아 엄마에게 오랜만에 사랑 가득 애교 가득 막내딸로 분해 전화드려야겠다.
”엄마~ 나 소고기 뭇국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