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하고 나와야지. 악! 아직 양말도 안 신었어? 어우, 야, 지금 8시 20분이여!!!”
매일 아침의 풍경이다. 우아하게 커피 한 잔 음미하며, 모나리자 같은 미소로 아이의 학교 준비를 함께 하는 그 엄마는 정녕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건가.
문제는 예민하고 나약한 우리 아드님의 장이다. 부모인 남편과 나, 우리 둘 중 누군가의 체질을 물려받았을 테니 미안한 마음이 먼저 앞서야 하지만 난 조용히 아니, 대놓고 남편에게 세모눈을 뜬다.
이건 확신의 남편 유전자다. 좋은 것만 물려줘도 부족한 마당에 본인의 가장 취약점이자, 생활하기 너무나 불편한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물려주다니!
기름기 많은 갈비탕이나 장어 같은 음식을 먹으면 길을 가다가도 다급하게 신호가 와 폭풍 전야의 경보를 시전해야 했다는 남편의 웃픈 에피소드는 연애할 적 본인도 신나게 썰을 풀고, 나도 박장대소하며 맞장구 치던 우리 사이의 시트콤이었는데.
이게 자식문제가 되니 마냥 웃어지지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시트콤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숙제가 돼버린 거다.
드디어 양치까지 끝내고 나온 아들에게 괜찮다라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지각=불성실’이라는 나만의 공식에 갇혀버린 나는 그러게 10분 먼저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느냐, 조금만 더 빠릿빠릿하게 준비를 마쳤으면 좋지 않으냐 등등
안그래도 아픈 배를 잡고 지각할 까봐 뛰어갈 생각에 안절부절인 아들에게 한껏 예민하게 굴고 말았다.
매번 미안함에 후회하면서 왜 꼭 그렇게 2절, 3절까지 내뱉고 나야 잔소리는 멈춰지는 건지.
허겁지겁 신발을 신다가 뒤를 돌아본 아이는 돌연 일자 입술이 되어 단단하게 말한다.
“똥 싸는 게 죄는 아니잖아.”
어느새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아, 맞네. 네 말이 맞네.
잘못한 행동이 아니라 그저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인 것 뿐이다. 되려 불편함을 줄이고 급박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을 더 배우고, 세심하게 챙김을 받을 아이인 거다.
아가일 때는 오히려 응가만 잘해도 무한 폭풍 칭찬을 쏟아내던 엄마가 이제는 등교 시간에 맞춰 큰일을 보지 못한다고 아이를 다그치고 있는 거다.
실제 아이는 일상생활에서도 언제 또 배가 아플까,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갔다가 수업시간에 맞춰 교실로 못돌아가면 어쩌나 등등 대부분의 또래들이 하지 않는 걱정을 안고 산다.
학교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면 친구들한테 창피하다고 수업시간 내내 끙끙 참으며 앓다가 결국 양호실에 가고,
친구집에 놀러 가서 화장실에 오래 있으면 안 되니 약속시간이 늦더라도 꼭 우리 집 화장실에서 큰일을 미리 보고 가야 하는 아이다.
어디 그뿐이랴. 짧은 거리일지라도 언제든 멈출 수 없는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은 타기 전 불안함에 십분 단위로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린다.
가장 마음이 짠한 건, 첫 해외여행을 앞두고 패키지 일행들이 자기 때문에 기다리는 상황이 생길까봐 정말 지금이야! 라는 신호가 올 때 화장실로 달려가 원샷원킬로 해결하고 나오는 연습까지 한다는 거다. 아이는 만나본 적도 없는 분들에게 벌써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귀염둥이. 몸도 마음도 얼마나 불편했을꼬.
미안함에 한껏 후회가 밀려오고 있을 때 막 일어나 미스코리아 사자머리를 휘날리며 다가온 유치원생 딸이 한마디 한다.
“엄마, 선생님이 똥 참으면 안 된다 그랬어. 오빠가 잘했네.”
언제나 화장실에 들어가면 한방에 빵! 쏘고 개운하게 나오는 네가 오빠의 괴로움을 알겠냐며 통통한 두 볼을 양손 가득 쥐고 주물거리다가 그 말을 곱씹어본다.
7살 아이도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을 왜 나는 저 멀리 던져두고 바로 앞의 작은 규칙과 시간에 얽매었을까.
규칙을 지키는 것도 분명 중요한 일이다.
다만, 아이가 자신의 불편함과 사회의 일반적인 약속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어려울 때현명하게 합의점을 찾아 흔들리는 작은 손을 잡아주는 게 부모의 역할임을 다시 깨닫는다.
아들아, 지각과 큰 볼일에 대해 선생님께 우리 솔직하게 상의드리고, 집에서 똥이라도 마음 놓고 싸자. 뭣이 중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