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히 May 22. 2022

최악을 상상하기

때때로 최악을 상상한다. 내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을 내 앞에 데려온다.

멈췄던 순간들 03.

최악을 상상하기


-

시력이 점점 나빠지는 것 같아, 눈이 간지러워, 한 주 내내 눈을 비볐다.

간지럽고, 간지러웠다. 인공눈물을 넣어도 소용없었다. 알레르기 같은 건 평생 없었는데. 조금만 어두워져도 눈이 흐릿했고, 멀리 있는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나빠지는 눈을 감각하는 일은 묘했다. 내 발로 낭떠러지를 향해 한 발 한 발 걷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나빠지는 걸 아는데, 어떠한 조치를 하지 못했다. 멀리 있는 물체와 글씨가 흐릿해지더니 점점 그 거리가 가까워졌다. 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 메뉴판도 보이지 않다니, 때때로 경탄했다. 그런 나를 보고 짝꿍이 내 손을 잡고 토요일 아침 안과에 데려갔다. 


어릴 때는 안경을 쓰는 아이가 멋져 보였다. 안경 뒤 가려진 얼굴엔 내가 모르는 세상의 비밀 두어 개쯤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안경을 쓰면 특별한 시선을 가지지 않을까 싶었다. TV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책을 펼치고 얼굴을 파묻었다. 브라운관의 작은 픽셀이 보였고, 책 속 글자는 읽을 수 없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는 무엇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은 거뜬했다. 안경도, 그럴듯한 비밀도, 나만의 시선도 없는 채 어른이 되었다. 

안경을 무척이나 쓰고 싶어 했던 어린아이의 모습은 기억나는데, 어른이 된 이후 쓰기 시작한 안경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저 귀찮고,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되었다. 컴컴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밤거리를 걸을 때, 얼굴을 가리고 싶을 때만 안경을 썼다. 


안과에서 정밀 검사를 위해 10분 단위로 눈에 안약을 넣었다. 앞으로 3, 4시간은 가까운 물체가 흐릿하게 보일 거예요, 간호사님이 말해주었다. 정말로 눈앞에 스마트폰이 잘 보이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조금 멀리 두니, 그제야 선명히 보였다. 어르신들이 눈을 반쯤 감으며 멀리 떨어트려 보는 이유를 직접 체험했다. 세상에, 너무 신기하잖아! 나는 짝꿍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달라진 시야가 무척이나 진묘했다. 그러다가 나 이러다가 영영 눈이 멀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짝꿍은 잠자코 있다가 한마디 했다. 

“승히는 불치병에 걸리는 환상이 있는 것 같아!” 

짝꿍의 말에 나는 대기실에서 우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서둘러 말도 안 된다고 되받아쳤다. 그렇지만 그런가? 속으로 되묻게 되는 말이었다. 내가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정말 웃기다! 말했지만, 멈칫했다. 들켜버린 속내를 웃음으로 가렸다. 


때때로 최악을 상상한다. 내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을 내 앞에 데려온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아파한다. 예방주사를 맞는 것처럼. 실제로 일어나지 않더라도, 혹시 모르니까. 스스로 믿지 못하는 바보 같은 일이다.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통스러워하면서 상상한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경험을 두 번 했고, 무척이나 생생하다. 한 번은 방에 누워서 두 팔을 들어 올려, 라면 스프를 가지고 놀았다. 왜 그러고 있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뜯어진 스프 가루는 눈으로 쏟아졌고, 미치도록 아팠다. 화장실에 가서 흐르는 물에 눈을 씻었다. 잠깐이지만 눈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맵다는 말을 이상하게 체득했다. 또 다른 기억은 낮잠을 잔 어느 날이었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눈을 떴는데 눈을 감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눈을 깜빡깜빡해도 빛이 보이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실명이라는 건가, 생각했다. 커다란 비극을 겪었는데 이상하게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도 눈을 떴을 때 보이지 않으면 그때 슬퍼하자, 하고 눈을 꼭 감았다. 잠을 자지도, 눈을 뜨지도 못한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눈을 뜨면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 될까 봐 무서웠다. 그 두려움을 아직도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 눈을 떴을 때 빛이 보였다. 누구에게도 설명되지 않는 일이지만, 내게는 선명히 남아있다. 


환상과 두려움은 어떻게 다를까. 환상은 은근히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고, 두려움은 피하고 싶은 것이라면 나는 그 중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하게 헤쳐나가고 싶은 마음과 무슨 일이 생겨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공존한다. 


정밀 검사를 마치고, 의사 선생님은 다행히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1년 사이에 시력이 갑자기 나빠졌으니 안경을 새로 맞추는 게 좋겠다고, 안경 처방전을 적어주었다. 안약을 넣은 탓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앞 안경원에서 안경을 새로 맞췄다.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어울리는 안경인지 몰랐다. 짝꿍이 괜찮다고 한 안경으로 골랐다. 시간이 지나니, 물속에 있는 것 같던 눈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안경을 쓰니 눈의 피로가 한결 나아졌다. 가려움은 아마 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꽃과 나무와 하늘이 선명히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지 않아도, 카메라로 메뉴판을 찍고 확대하지 않아도 식당의 메뉴를 읽을 수 있었다. 빛 번짐이 없어졌다. 나쁨을 감각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지레 겁을 먹고, 최악을 상상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안경 쓴 이의 비밀이 있다면 단순하다. 제대로 된 안경을 쓰니 편하고,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