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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미 May 16. 2020

어린 내가 꼰대를 싫어하는 이유

건강하지 못한 글쓰기

 밝고, 행복하고, 좋기만 좋은 다미. 물론 내가 한없이 긍정적인 편은 맞지만 싫어하는 것도 참 많다. 책이나 영화를 볼 때 사람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장르를 좋아한다. 민망하고, 드럽고, 치사한 이야기들. 내가 열심히 가려온 단면을 적어 보려 한다. 어딘가 음침하고,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악마를 드러내 보려 한다. 욕먹어도 괜찮지는 않겠지만 용기 내 적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꼰대'에 관한 이야기다.


 의도해서, 의도하지 않아서 나보다 나이 든 모임에 자주 끼어들곤 했다. 처음 시작은 2학년이었다. 나는 2학년 주제에 고학년 수업을 들어 조별 과제 무임승차를 당했다. 서로 학번과 나이를 말했고, 나이가 제일 많은 복학생 오빠가 사명감인지 뭔지 자기가 팀장을 하겠다고 자진했다. 나머지 팀원들은 알아서 중요한 임무를 맡았고 나에게는 어렵지 않은 과제를 내주었다. 그 후로도 나는 스물세 살에 삼십 살 친구들이 많았고 나는 그들과 상하관계를 따지지 않고 '진경아 뭐해' 하며 울타리 없이 놀았다. 물론 모두가 고진경처럼 울타리를 허물어 주지는 않았다.

 코로나로 일자리가 없는 시기에 운 좋게 주말 계약직을 구했다. 업무는 혼자 봐서 직원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지만 만날 때마다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했다. 신입사원 임용 날이었다. "최다미씨? 어이구. 우리 둘째 딸이랑 나이가 같네. 고등학교 어디 나와신가?" 확 얼굴이 달아올랐다. 전 당신이 씻고 먹이고 키웠던 둘째 딸은 아닌데요. 옆에 있던 신입사원이 묻는다. "알바~? 몇 살~? 스물다섯? 내가 이모네~" 아뇨. 당신은 저의 직장 동료인데요. 나는 그렇게 매주 온갖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며 업무를 본다. 그러던 중 최근 술자리에서 최강 꼰대 자질을 가진 구십일년생과 술자리를 가졌고, 그녀가 나의 꼰대 혐오 버튼을 누르고야 말았다.

 친한 오빠가 한 명 있다. 제주에 와 처음 사귄 친구다. 집에만 있기 심심해 헬스장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오빠랑 월화수목금 일하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땀 냄새가 빠지지 않는 운동복에 세제를 때려 붓고, 수납함을 발로 닫는 모습을 들킨 나는 그대로 그만두었지만. 그 오빠랑은 계속 친구로 남았다. 그 오빠는 돈에 미친 사람이라 지금은 돈 많이 주는 기업에서 일을 하며 재테크에 빠져 살고 있다. 어제는 술자리에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언니를 데리고 왔다.

 내 친구 현정이는 구십팔 년생, 나는 구십육 년생이다. 그리고 그 오빠랑 그 언니는 구십 일년생이다. 언니는 우리에게 나이를 묻고는 "내가 언니네. 말 놓을게." 했다. 그러다 남자 이야기로 흘러갔는데 그 언니는 "애들아. 너네 제주 남자는 만나지 마라."며 점점 피곤해질 것 같은 불길한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언니네 아빠랑 할아버지는 제주 남자가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많이 만나." 하도 입이 근질거려서 묻고야 말았다. "뭐가 얼마 안 남아요?" 그 언니는 잠시 당황하더니 대답했다. "인생은 짧은데 많이 만날 시간이 없잖아." 쿨한 언니처럼 보이려 멘트에 후추 양념을 촥촥 뿌린 것처럼 들렸다.


 뿌리 염색 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 언니의 검은 뿌리를 쳐다보는데 그 언니가 묻는다. "다미는 졸업하고 뭐 하려고?" 나는 대충 답했다. "글쎄요. 취직하려고요." 처음 만났는데 나만 강제로 존댓말을 하는 게 불공평하지 않나 생각했다. "아직 스물다섯이라며. 여자는 스물여덟 넘어서 취직해도 돼." 내 스물다섯이랑 언니 스물다섯이 같냐고. 아이유는 스물다섯에 지드레곤이랑 팔레트를 불렀는데 언니도 그랬어요? 묻고 싶었지만, 말이 안 통해서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꼰대가 나쁜 건 아니지만 비호감이라는 말이 있다. 아니다. 꼰대는 나쁜 게 맞다. 꼰대는 자기보다 어린 상대를 (심하게 말하자면) 무시한다. 초등학생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감정과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다. 짜파구리에 짜장 소스를 두 개 넣어야 한다는 절박한 개네들에게 좀 아닌 것 같아도 이유를 들어 본다. 꼰대는 어린 친구들을 '과거 어리석었던 나'의 모습에 투영한다. 예를 들어 내가 글을 쓰거나 요가를 한다고 하면 그들의 과거와 비교한다. "다미씨는 나이와(윽..)다르게 사시네요. 저는 어릴 때(으윽..!) 그런 거 안 했거든요." 나이에 '걸맞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게 뭐든 무례하다. 나는 '나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에 걸렸다.


 나에게 10이 있으면 그들은 나의 1만 본다. '나이'에 관련된 것들. 스물다섯인데 졸업은 했는지, 여행은 얼마나 했고, 연애는 얼마나 했는지, 돈은 좀 버는지. '스물다섯은 뭐 고만고만하겠지.'라고 여기며 나에 대한 판단은 그걸로 끝이다. 상대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구나 싶다.

 나이 많은 꼰대들은 비슷한 경제 수준인 어린 친구들 앞에서 지갑을 쉽게 연다. 동생들이 카드 내는 걸 본인이 쿨하지 못한 언니, 오빠로 생각할 테니. 동생들과 경제 수준이 서로 비슷해도 더치페이는 없다. 직장 다니며 동생들 밥 사주겠다는 사람들에게는 고맙다. 똑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상황에 언니라서, 오빠라서 긁겠다는 건 서로가 부담이다. 과거 집안일만 하던 여성들과 달리,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경제적 무게를 이겨내야 했던 남성의 성 역할처럼. 차별은 서로 받는 게 분명하다.


 나는 나 자신을 '나이'와 상관없이 바라본다. 나는 내가 어리다고도, 나이가 많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최다미는 작년에 비해 훨씬 게으르다. (상담교사인 엄마에게 말했더니 나에게 책을 하나 선물했다. 도착한 택배를 현정과 뜯어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책 제목은 '굿바이, 게으름'이다.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는 나에게 그저 웃음을 선물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는 진지하다.) 또 나는 코로나 이전에는 관심 없던 국제 정세에 관한 뉴스를 미친 듯이 보기 시작했고, 지난달에 비해 다리가 더 많이 찢어진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건 나이와 상관이 없다.


 가만히 아무 생각 없이 앉아만 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먹는 게 나이가 아닐까? 우주는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몇억 광년을 보냈다. 원자, 수소 뭐든 우주는 빈공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25년 된 우주와 비교해본다면. 우주의 역사를 읽는 25년 된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성장 속도는 다르다. 심지어 무얼 잘하고 못하는지 방향까지 다르다. 전교 부회장에 당선된 초딩 최다미처럼 지금의 최다미도 감투 쓰는 걸 좋아한다. 레이스 달린 원피스만 입던 스무 살의 최다미와 달리. 지금은 매일같이 레이스 없는 윗도리와 아랫도리를 따로 입는다. 당신이 겪었던 스물다섯은 내 스물다섯과 다르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사납고 날카롭지만 좋아하는 말이다. 조언하던 사람의 정신을 퍼뜩이게 하는 말. 찌질한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 언젠가는 내가 꼰대에게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는 당신과 살아온 환경이나, 경제 수준이나, 보고 듣고 경험한 게 다르잖아요. 제 상황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우리 엄마랑 아빠랑 언니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는 날이 오길 바라고 바라고 바라고 바라고 바라고 바라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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