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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미 Nov 30. 2019

엉진망창 첫 번째 자취생활

아무 문제없는 줄 알았어요

제주시 아라동 인다마을에는 벽화가 있다. 벽화에는 고전 동화가 알록달록 그려져 있다. 잭과 콩나무, 피노키오, 콩쥐팥쥐, 해님달님, 백조의 호수. "이 정도면 서울에서 벽화마을인데." 내 말에 따라오던 제주도 아이가 "푸핫, 서울 촌놈"하고 웃는다. 벽화를 지나면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신축 건물이 나온다. 나의 첫 자취집이다. 복도 끝에는 내 방이 있다. '885255'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연다. "와우. 언니 집 진짜 심하네."


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바닥은 이삿짐 박스, 빈 물병, 대학 교재가 널려 있었다. 침대에도 온갖 종류의 물건이 있었다. 양말, 재킷, 바지, 수건, 충전기. 난 매일 그것들과 같이 잤다. 물건 하나 찾는 게 힘들었다.


부모님이 제주로 내려와 집 계약부터 장보기까지 함께 했다. 부모님은 매트리스 커버, 밥솥, 냄비, 가위 하나하나 꼼꼼히 골라줬다. 카트를 가득 채워 계산대에 올리자 십, 이십만 원이 넘었다. 그렇게 수십 가지가 넘는 물건을 샀지만 집으로 가니 박스를 뜯을 가위가 없었다. 아빠는 "이번만이야. 이건 주방가위야." 하며 박스를 뜯고 주방에 돌려놓았다. 그렇게 난 주방과 문구 가위를 구별하지 않은 채 "이번만이야"를 외치며 몇 개월을 살았다.


서울에서 나는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으면 며칠 뒤 곱게 접힌 상태로 돌아왔다. 세탁기 버튼 한 번 누르지 않았고, 널지도, 개지도 않았다. 밥솥도 초면이었다. 냄비와 프라이팬은 말할 것도 없다. 미역국 한 그릇 할 줄 몰랐다. 미역국을 처음 만든 날 끓는 물에 미역을 넣자마자 완성된 줄 알았다.

'에잇 맛없어.' 내가 만든 음식은 맛이 없었다. 요리의 비법인 다진 마늘이 있어도 사용법을 몰랐다. 마트에 덩그러니 서서 뭘 먹지 고민하던 차에 맛을 배신하지 않는 식품을 발견했다. 냉동식품. 냉동 떡갈비, 냉동 치즈스틱, 냉동 동그랑땡을 냉동실에 채워 넣었다. 냉장고보다 냉동실이 더 컸으면 싶었다. 냉동식품은 조리법도 간편하고 맛있었다. 그래도 같은 맛을 매일 먹으니 지루했다.


백종원 씨가 '집 밥 백 선생의 반찬 58'을 출간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바로 서점에 달려가 사 왔다. 책에는 각종 반찬과 찌개 끓이는 법이 있었다. 작은 술 3, 큰 술 1/2, 양파 하나. 정량이 적힌 레시피는 맛있는 음식을 내놓았다. 순두부찌개, 김치찌개, 어묵볶음. 몇 시간이 걸려 만든 요리는 맛있었다.


일 년의 자취 생활이 지나고 인바디 검사를 했다. 의사 선생님은 결과지를 보고 나에게 편식을 하냐고 물었다. 아무거나 잘 먹는 나는 충격을 받았다. 먹고 싶은 대로만 먹으니까 식단에 불균형이 생겼나 보다. 가진 재료를 활용해 요리하는 것은 끝나지 않는 숙제 같았다. TV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요리사와 매 끼니를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대단하다. 요리는 생활이고 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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