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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PD Oct 21. 2022

왜 어머니께서는 세일 중이냐고 물으실까

너무 힘든데 쇼핑은 하고 싶어 (4)

"그래서 이거 세일 중인 거유?"


세제 매장 직원의 설명을 한참 듣던 어머니께서 무심한 듯 물으셨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것일까, 직원은 잠시 머쓱한 표정을 보이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어머님, 이거 오늘까지만 10% 세일하는 거예요."

"그럼 하나 줘봐요."


어머니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세제를 카트에 담으시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점원의 설명을 대충 듣다가 세일 여부를 묻고 살지 말지 결정하는 모습. 어머니를 모시고 마트에 가면 종종 보게 되는 장면이다.


그런 과정을 지켜볼 때마다 이게 합리적인 쇼핑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는 한다. 세일이라는 포장지에 가려져 효능이 별로인 제품을 구매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 년간 장을 봐온 어머니께서 그런 쇼핑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 어머니께서는 세일 여부로 구매를 결정하시는 걸까.   




누구나 예상 가능하듯 홈쇼핑 방송 중 가장 고객의 반응이 뜨거운 방송은 SALE 방송이다. 같은 상품을 원래 지불해야 했던 가격보다 더 싸게 살 수 있다면 당연히 이득이라고 생각되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PD들은 더 높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세일 표현을 고민하면서 콘텐츠를 제작하곤 한다. 직관적이고 명확한 세일 표현은 당연히 매출에 많은 기여를 하는 탓이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SALE에 기분 좋아지는 까닭은 기존 가격이 표기가 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즉 비교 가능한 원래의 가격이 적혀있는 탓에 오늘 얼마나 싸게 살 수 있는지 체감을 할 수 있고, 그 폭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의 경제적 이득을 본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인 것이다.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란 이처럼 처음에 인상적이었던 숫자나 사물이 기준점이 되어 그 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뜻한다.


이러한 효과는 꼭 SALE 기간의 쇼핑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매우 자주 접하게 되는 현상이다.


편의점 음료 진열대에서 흔히 보게 되는 '1+1' 행사도 앵커링 효과를 겨냥한 대표적인 판매 전략이다. 1개의 가격을 뻔히 알고 있는데 하나를 더 준다면 누구라도 반값에 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원래의 가격이 제대로 책정된 가격인지 의심을 품어볼 법도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반값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었을 테니까.


직장인들의 연말 평가 기준으로 전년도의 평가가 크게 작용한다는 것은 다소 씁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지난해 A를 받은 직원이 올해 C를 받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짐은 어쩔 수 없다. 반면 지난해 C를 받은 직원이 아주 좋은 성과를 내지 않는 이상 A를 받는다는 것도 쉽게 상상이 안된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할 때 비교 대상이 될만한 기준을 정하게 되는 이유는 그 편이 결정을 내리기 쉽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 제대로 설정된 기준이냐의 여부이다.


지인이 어떤 회사의 주가가 많이 싸니까 사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보통 주가가 싸다는 얘기를 하려면 그 회사의 미래 가치나 현재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는 게 이치에 맞다. 하지만 그가 싸다고 생각한 근거는 그저 '많이 떨어져서'이다. 1만 원을 하던 주가가 5천 원이 됐으니 얼마나 저렴하냐는 식이다.


그러나 그 회사의 적정가치가 5천 원이라면 사실 1만 원은 거품 가격이었던 것인데, 그 지인은 거품가를 기준점으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그 회사의 주가는 5천 원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떨어졌고, 그도 제법 손실을 입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정해놓은 기준이 근거 없이 설정되었을 때 안 좋은 결과를 얻기 쉽다는 점은 앵커링 효과의 커다란 맹점이 아닐 수 없다.




‘그 친구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 겪어보니까 내가 생각하던 사람이 아니더라고...’


누군가에게 실망을 했을 때 종종 듣게 되는 말들이다. 이런 경우는 보통 그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예상한 수준에 못 미쳤을 때가 많다. 즉 그 사람의 피상적인 모습이 기준점으로 작용을 했을 때 벌어지기 쉬운 일인 것이다.

특히나 사람은 직접 겪어보면 예상과는 다른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상품도 써보기 전에는 특장점을 명확히 알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지금 누군가에게 실망을 하고 서운한 감정이 든다면 내가 잡았던 기준점이나 기대치가 무엇이었는지 먼저 생각해보자. 그 기준이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았다면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더라는 결론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애당초 겪어보지도 않고 정확한 결과를 예측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저 겪어볼지 말지에 대한 판단에 도움이 되는 '기준'을 설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필품을 구입할 때 어머니의 세일 여부 질문은 심오한 측면이 있다.

어머니께서는 기존에 쓰던 상품과 결별하고 새로운 것을 써봐야겠다 싶을 때 그 명분을 세일에서 찾고 계셨던 것이다. 기준점을 엉뚱하게 잡다가 낭패를 보는 것보다는 세일 여부를 가지고 구매 결정을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신 것이지 싶다.


아무리 상품이 좋다고 떠들어본들 직접 써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나름의 쇼핑 철학을 터득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허술한 듯 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불만 없는 쇼핑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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