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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십사 메가헤르츠 May 18. 2024

신은 정말 기도를 들어줄까?

내가 신이라면 ‘이번엔 네 차례야.’


이번 글은 입원실에 들어가 있는 두 명의 조카와 아픈 아이들 그리고 그 부모님들을 위해 적습니다.


S#1. 1996년/ 서울


‘꾹’

새벽 미사에 참석한 어린이들에게 도장을 찍어준다. 오늘은 그 표에 도장을 다 찍은 날이다. 나는 매일 아침 6시 미사를 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 더 자고 싶다. 너무 춥고, 졸리다…‘

나는 단지 도장을 칸에 다 채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미사시간에 졸았는지, 무슨 기도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 존재의 유무를 알기도 전에 세례를 받았고, 교리를 받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존재를 믿게 됐고 신께 기도하며 요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S#2. 2024년/ 오클랜드


평생을 믿어온 ‘신’이라는 존재는 정말 내 기도를 들어주고 답해줄까?


어른들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이루어 ‘주시니 꾸준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럼 왜 당장이 아니라 한참 뒤에 들어주실까? 장기간 간절함을 가진 사람부터 기도를 들어주시는 거라면 단기간에 간절함을 가득 담아 기도하면 가능할는지.


또 다른 사람들은 큰 일을 해낼 수 있게 힘듦과 역경을 주시고 그것을 이겨낸 후에야 큰 일을 주신다고 한다. 그럼 이루고자 하는 큰 일을 먼저 주시고 고난을 주실 수도 있는 걸까?


울며불며 떼부리면? 아침부터 밤까지 무릎 꿇고 앉아 기도만 한다면?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면? 그럼 바로 들어주실까?



S#3. 내가 신이라면


전 세계의 사람들이 1초 단위로 원하는 바를 기도하고 바란다면 신은 얼마나 할 일이 많을까? 아마 내가 신이라면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만 좀 바라고 원하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모두의 기도를 못 들어주는 것인지도.


선착순으로 들어줄 수도, 간절함을 숫자로 표현해 순위를 정할 수도 없으니 누군가의 무엇을 어떻게 골라 들어줘야 할까 참 어려운 일일 것이다.


결국 원하는 것을 놓쳤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한번 더 힘을 짜내어 일어나는 사람, 무너질듯한 힘든 상황에서도 마지막 힘을 다해 겨우 버티고 있는 사람. 긴급하고 간절한 수많은 사람들.


하지만 무엇보다 작디작은 몸으로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한 아이들. 술이나 담배등의 행동적 결과가 아닌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정확한 원인도 알 수 없는 아픔을 이겨내야 하는 아이들. 한없이 밝고 예쁜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고통.


그리고 그 아픔을 바라보며 쓰리다 못해 타들어가는 가슴을 숨기고 아이에게 웃어 보여야 하는 부모들. ‘왜 우리 아이일까.’, ‘차라리 내가 아팠다면.’, 등 원망과 분노를 넘어 아이를 지켜내야만 하는 간절하고 애타는 마음.


내가 신이라면

 ‘그래. 이번엔 네 차례야. 너의 기도를 들어줄게. 그리고 아이가 아픈 건 아이의 잘못도, 부모의 잘못도 아니야. 그동안 고된 역경을 이겨냈으니 이제 큰 행복을 줄게.’라고 말해주고 싶다.




정말 바라고 바라고, 간절하고, 애타게 기도해 정성이 하늘에 닿는다면, 상상한 것처럼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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